성인 여성 adhd 생존기
"초등학교 통지표에 '산만하다'는 말 있었어요?"
내 증상을 듣고 난 의사의 첫 마디였다.
헛웃음이 나왔다. 나는 우울증과 불안증 약을 처방받기 위해 이 병원을 찾아와 의사선생님께 내 문제를 털어놓는데 기껏 물어본다는 게 40여년 전 초등학교 통지표? 그게 내 증상과 무슨 관련이 있지.
그러나, 한편으론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주의가 산만하다'라는 말은 내가 기억하는 첫 초등학교 통지표에 있던 말이다. 2학년 1학기 때의 일이다.
여름방학이 되어 신나게 집에 돌아갔다. 도착하자마자 엄마에게 자랑스레 선생님의 통지표를 읽어드렸다.
"엄마, 내가 주의가 산만하대. 근데 '주의가 산만하다'라는 게 뭐야?"
그렇다. 주의가 산만하다는 어려운 표현을 초2가 알 리 없다. 엄마는 활발하다는 뜻이라고 말해줬고, 역시나 통지표의 그 단어가 40년 후에 진료실에서 기억날지 모르고 그저 기쁘게 방학을 맞이했던 기억이다.
그후로 한참이 지나서야 '주의가 산만하다'는 말의 의미를 알았다. 그걸 알고서도 심각해하는 사람은 내 주위에 없었다. 난 공부를 곧잘 했고, 친구도 없지 않았다. 가끔 미화부장이나 부반장같은, 역할은 미미하나 사회성이 없으면 안되는 임원도 했다. 게다가 나의 부주의하고 산만하고 끈기없는 성격을 가장 잘 이해하는 분은 역시나 비슷한 성격의 엄마였다.
"네, 그렇긴 했어요"
마뜩찮게 대답했다. 마치, 그런 말 한마디 쯤 안들어본 사람이 있겠냐는 식으로 변명하고 싶었을 것이다. 의사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아주 간단한 검사지를 줬다. 대충 끝내고 약이나 받고 싶은 생각에 빨리 체크해나갔다. 의사는 빠르게 되돌아온 검사지를 보더니 말했다.
"ADHD가 맞네요"
네? 제가요? 반발심이 들었다. 제가 지금 약간 기분도 그렇고, 불안한 성격도 가졌지만요, 멀쩡히 좋은 대학 나와서 사회생활 하다가 제 일도 하고 결혼도 해서 애도 있는 사람이라고요. 그런데, ADHD라고요?
"긴 책을 잘 못읽죠?"
"아니요, 잘 읽는데요" (심지어 책 읽는 걸로 밥벌이하는 사람이에요)
"긴 문장 같은 거 읽고 문제 못 풀었을 것 같은데"
"아니요, 시험 잘 보는 편이었어요" (언어 영역 잘했다고요)
"수학같은 문제풀이 약하죠?"
"아니요, 수학 좋아했어요" (수학 상위 1%였어요)
참나, 돌팔이 아냐. 어떻게 저렇게 다 틀리지? 내가 뭘봐서 이런 진단을 하는 거지? 하는 순간
"수업시간에 잘 집중 못하고 잘 졸았죠? 심지어 시험시간에도 잤죠?"
"끝까지 있어야 하는 놀이나 일에서 중간에 나오거나 자리 지키기 힘들죠?"
"일은 한없이 미루는데, 뭐 기다리는 건 못하죠?"
이런 족집게 같은 말들을 물어봤다. 네, 맞아요. 완전 그래요. 그런데, 저는 아무래도 자존감 문제인 것 같은데요, 왜냐하면 저는 사람들의 말을 굉장히 오래 곱씹고, 혼자 오해하다가 틀어지는 경우가 많아요. 지금 그것때문에 온 거에요. 그건 왜 그런거죠?
"생각이 너무 많아서 그래요, 다른 사람이 한마디 하면 그걸 혼자 백번 생각하니까요, 역시 ADHD가 맞네요"
혼이 빠진듯, 약을 처방받고 집에 돌아와 ADHD에 대해 찾아봤다. 그리고, 유튜브를 보고 책을 빌려봤다. 그리고 나서 한탄했다. 수많은 심리관련 컨텐츠나 자존감 관련 영상, 자기계발 도서에서 찾지 못했던 바로 '나'가 거기 있었다.
나와 똑같은 인생을 가진 사람이, 이렇게나 많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