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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나연 Aug 16. 2019

피터 파커가 현실시간 그대로 나이를 먹었다면

스파이더맨: 라이프 스토리 (2019) #1 리뷰

요새 몇년동안 마블은 "새로운" 것에 집착하는 경향을 보였어요.  마블 나우! 올디퍼런트 마블! 프레쉬스타트 마블! 세상에 알았어 진정해! 어차피 항상 똑같은 캐릭터로 비슷한 거 내면서 뭘 그렇게 유난이야! 이렇게 시니컬한 생각이 들다가도 돌이켜보면 나름대로 캐릭터들에게 트위스트를 줘서 다양한 시도를 하는 건 정말 좋았고 그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후한 점수 주는 편이에요. 하지만 그것도 5년쯤 지나니까 슬슬 지겨워지기도 하고, 많은 사람들이 예전을 그리워하게 되는 건 사실이더라고요. 최고의 튜닝은 순정이라고 했잖아요? 최근의 마블은 복고풍이 대세입니다.


그런 복고의 물결에 <스파이더맨: 라이프 스토리>만한 시리즈가 없어요. <피터 파커: 스펙타큘러 스파이더맨>의 칩 즈다스키가 쓰고, <얼티밋 스파이더맨>을 포함해서 80년대부터 꾸준하게 스파이디를 그려온 마크 배글리가 펜슬링을 맡은 이번 작품은 시대별로 피터 파커의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코너스톤들을 하나씩 조명해보는 시간을 가져봐요.


즈다스키는 요즘 제가 가장 사랑하는 작가 중 한명이에요. 사람이 진짜 웃긴데다가 글쓰기도 그림그리기도 참 잘하는 재능꾼이거든요. 이번 작품의 표지들은 즈다스키가 직접 그린 그림들. 정말 대박이죠ㅠㅠ 표지에 시대가 명시돼있지 않아도 딱 시대상을 알수있게끔요. 60년대는 베트남전쟁, 70년대는 호박폭탄과 디스코볼, 80년대는 크레이븐의 관짝과 냉전시대, 90년대는 클론사가로 대표되는 아이덴티티 크라이시스! 총 6부작으로 아직 2편의 시놉시스/표지는 공개되지 않았는데 정말 기대가 많습니다.


이슈 1편을 읽으면서 가장 놀라웠던 건 단순히 그 시절 이야기를 리패키지해서 내놓는 거에 그치지 않고, 아예 주인공 피터 파커를 그 시대에 맞춰서 나이까지 함께 핀포인트 잡아 확실하게 고정시켜서 등장시켰다는 거예요. 마블코믹스의 타임라인과 캐릭터의 나이는 오랫동안 쉬쉬하며 대충대충 때워왔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상식적으로 1940년대에 나찌에 대항해 싸웠던 캡틴 아메리카가 1960년대에 다시 등장해서 2019년인 지금까지 등장하고 있다는 건 캐릭터의 나이가 100살이 넘는다는 뜻인데, 책을 읽어보면 스티브 로저스는 나이를 단 1살도 먹지 않은 것처럼 탱탱하거든요. 곰곰이 생각해보면 어딘가 이상하죠?

<어메이징 판타지>(1962) #15 고등학생 피터 파커, <어메이징 스파이더맨>(2015) #1 대기업 C.E.O.가 된 피터 파커

마블코믹스가 연재되는 우리 현실의 시간과 마블코믹스 세계관 속의 시간은 얼핏 보면 비슷한 듯해요. 1960년대 연재되던 책에서는 식당에서 돌돌 만 시가를 꼬나물며 타자기를 타닥타닥 치던 엑스트라들이 2010년대에 연재되는 책에서는 흡연구역에서 전자담배를 피며 스마트폰과 에어팟을 쓰곤 하지요. 마블코믹스 세계관은 분명 시간이 흘러 업데이트 됐습니다. 마블코믹스는 현실시간의 변화와 발전을 흡수했습니다. 하지만 시간흐름의 경과는 현실과 결코 동일하지 않아요. 만일 동일했다면 1962년에 고등학생 15세로 등장했던 피터 파커는 지금쯤 70살이 됐어야 합니다. 그에 반해 2010년대 피터 파커는 28살 청년으로 묘사되고 있어요. 정리하자면 마블코믹스 속의 시대상은 계속해서 바뀌지만 유독 캐릭터의 나이에 국한해서는 시간이 천천히 흘러간다는 의미입니다. 마블코믹스를 비롯한 슈퍼히어로 장르는 기본적으로 캐릭터 장사이기 때문에 어쩔수 없는 일이기도 합니다. 하늘을 날으며 주먹질을 하는 자경단 활동은 신체적으로 가장 최전성기에 있는 젊은 청년이 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일 테니까요.

위의 설명이 일반적인 마블코믹스의 경우라면, <스파이더맨: 라이프 스토리>에서의 선택은 그와는 정반대입니다. 마블코믹스 세계관 속 시간을 우리가 사는 현실시간의 타임라인과 합치시켜서 피터 파커의 나이를 그대로 묘사하고 있어요. 1962년에 15살 고등학생이었던 피터 파커는 이 코믹스에서 자라나 1966년에 19세 대학교 신입생이에요. 리얼타임으로 나이를 먹는 게 허락된 상황! 그로 인해 피터 파커는 당대 또래 청년들이 하던 고민을 그대로 해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셈이죠. (그렇다고 원작 클래식 작품에서 그런 걸 아예 안 했다는 말은 절대 아닙니다!) 좀 더 현실성과 사실성이 높아졌다는 평을 남겨볼게요.

베트남 전쟁이 격화되고 있다. 스파이더맨을 우상으로 삼는 고교 동창의 입대 결정에 놀라는 피터 파커.

갓 성인이라면, 더군다나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라는 신념을 품고 있는 초인 당사자라면 전쟁을 하는 자국의 상황을 보면서 깊은 고민에 빠지는 것이 당연합니다. 대표적인 히어로 아이언맨이 이미 베트남으로 날아가 군인들을 독려하고 지휘하는 마당에 과연 슈퍼히어로를 자처하는 스파이더맨은 무슨 선택을 해야되는가, 나도 자원 입대해서 싸워야만 하나, 그런 고민들 말이죠. 심지어는 자신을 괴롭히던 양아치 깡패였던 플래시 톰슨조차도 군복을 입기로 결정했는걸요. 게다가 그 이유가 "내가 존경하는 스파이더맨이라면 마땅히 이런 결정을 했을 테니까"라는데 더 말할 게 있나요! (그 말을 들은 피터의 표정을 보세요, 정말 걸작입니다.)

베트남의 민간인을 보호하는 캡틴 아메리카

피터는 이번 이슈에서 미국의 군인 신분으로 세계2차대전에 참전해 싸웠던 영웅 스티브 로저스와 만나 자신이 전쟁에 나서야 하느냐에 대한 조언을 받습니다. 자국에서 이웃을 지키는 자경단일도 타국에 나가 총을 쥐는 것 못지 않게 자국을 위한 일이라는 대답을 받아요. 또한 이번 이슈의 마지막은 피터 파커가 아닌 캡틴 아메리카가 장식합니다. 스티브 로저스는 베트남에 나가서 '베트콩'을 축출한다는 명분으로 민간인 학살을 자행하는 자국의 군대에 맞서 싸우며 자신의 신념에 따라 미국의 올바른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마무리하지요. 50년 전 역사를 이야기하는 작가의 비판적 시각에 깊이 공감하는 바입니다. 그렇습니다. <스파이더맨: 라이프 스토리>는 피터 파커의 인생 이야기임과 동시에 미국의 역사를 비판하는 다분히 정치적인 책이었어요.


혹자는 슈퍼히어로 코믹스가 오로지 '재미'만을 추구하는 단순한 심심풀이 땅콩으로만 기능해야 한다고, 소위 '정치적으로 올바른(PC적인)' 이야기는 해선 안 된다고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저는 그럴 때 이제는 고인이 된 스탠 리의 짧막한 사설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정치라는 것은 그 자체로는 무겁고 어렵게만 느껴지지만 생각보다 우리들과 아주 가깝고 친밀한 이야기입니다. 마블코믹스는 어떤 관점에선 유치하기만 했던 그 예전서부터 시대상을 비판하고 이상적인 인간상--히어로!--을 제시하는 노력에 망설임이 없었어요. 이제와서 그런 방향에 반대하는 건 너무 늦지 않았나 싶습니다.

미국의 역사와 함께 피터 파커의 역사도 함께 흐릅니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대학에 막 입학했던 피터 파커는 대학동기 그웬 스테이시와 사랑의 꽃봉오리를 피우고 있고, 60년대 코믹스에서 빠질 수 없는 강력한 슈퍼빌런 그린 고블린의 추악한 집착도 함께합니다. 피터 파커와 노먼 오스본은 클래식 코믹스에서 크게 두 차례 충돌하는데 첫번째가 <라이프 스토리> 이슈 1권에서 다룬 사건. 노먼 오스본이 피터 파커의 정체를 알아낸 후 접전 끝에 노먼이 기억상실에 걸려 그린 고블린이 퇴장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지요. 정확히는 클래식 코믹스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40에서의 일입니다.

두번째는 모두가 잘 아는 그웬 스테이시의 죽음, 그리고 그 뒤를 따른 '그린 고블린의 죽음'입니다.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122의 에피소드. 70년대에 쓰여진 책이니 <라이프 스토리> 다음권에서 그웬이 죽을 거라는 걸 짐작할 수 있죠. 에효~ 그웬은 2019년에도 어김없이 죽는군요. 안타까울 따름이에요. 죽음 자체가 너무 기념비적이라는 게 이런 문제를 낳습니다. (참고 리뷰)

총평하자면 <스파이더맨: 라이프 스토리> 첫시작이 정말 좋았어요. 앞으로가 무척 기대되는 6부작 리미티드 시리즈입니다. 저는 오랫동안 스파이더맨 코믹스를 읽고 있지만 오래 전에 나온 클래식 코믹스들은 아직 '정복했다'라고 말할 수 없는 수준이에요. 읽지 못한 책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분량이 분량이어야죠. 그래도 이렇게 편집부가 '그때 그 시절'을 테마로 잡아서 패러프레이징(Paraphrasing)을 해주는 덕에 신세대 독자들이 클래식을 보다 친숙하게 접할 수 있어서 좋아요. 요즘 거미 부서는 최고조의 컨디션으로 돌아가고 있어요. 이런 식이라면 통장에 빨대 꽂혀도 엉덩이춤추며 돈을 퍼다 바칠수 있다구요~ 마크 배글리도 일부러 60년대 딧코~로미타풍 스타일을 의식한듯한 작화가 무척 인상적이었어요. 아주 칭찬해! 이렇게만 하란 말이야! 여러분께 제가 감히 일독 강추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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