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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혜령 Jun 27. 2016

내가 당신을 '일반인'이라고 부를 때

일반인이라는 말이 불편한 이유

지인의 부탁으로 문화센터 강의를 기획하게 되었다. 일상에서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다양한, 심리나 글쓰기 프로그램을 퍼뜨릴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싶었는데, 생각지도 않게 강사섭외 과정에서 걸림돌 발생.  


강의를 요청받은 강사들이 어렵게 거절을 하면서 털어놓은 고민들은,

해몽을 배우는 시간이 아닌데, 수강생들이 착각하고 와서 수업 분위기를 깬다거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문제가 바로, 그 자리에서 드라마틱하게 해결되기를 바란다거나 혹은 수강생들이 강사의 수업에 당연히 열정적으로 참여할 것을 전제로 한다거나 같은, 주로 수강생과 관련된 내용이었다.

그 대화에서 공통적으로 나왔던 단어가 바로 ‘일반인’. '일반인은 그런 것을 모른다'. '일반인은 그런 욕구가 없다', '일반인이 그렇게 생각할까?' '일반인이라서...글쎄요.'.


그런데, 일반인은 도대체 누구?

여기에서 일반인은 수업에 참여하기 위해 ‘마땅히’ 알아야 할 사항을 모르고 강의에 참여하며, 개별성이 없기에 집단과 구분되지 않는 한 명을 가리키는 단어로 짐작해 볼 수 있다.

아니, 심리 프로그램이 상대성 이론이나 양자 물리학만큼 거창하고 지적 수준을 요구하는 거라서, 그 특수성까지 미리 알아 헤아릴 수 있는 사람이어야만 비로소 참여할 수 있는 거였나. 그 말이 걸리기 시작한 것은 나의 정체성이 일반인에 가깝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아, 나의 열등감이여)


급 피곤해졌다. 일용할 양식을 주는 생업의 속도를 따라가기도 벅차건만 자기 자신을 돌보기 위한 프로그램조차도 뭘 알아야만 하다니. 지식은 없어도 동앗줄 잡는 심정으로 참여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A를 B로 오해해서 참여하는 사람도 물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라도 참여한다면, 그 자체가 성장을 위한 한 발자국 아닌가. 물론 실망해서 중간에 자발적으로 그만두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이는 참여자의 과제이다.

심리 프로그램들은 강의자 자신이 아니라 참여자의 성장을 돕는 일을 지향한다. 그런데 왜 참여자가 일반인이라는 점이 문제가 된단말인가.


일반인의 반댓말은 비일반인, 전문가, 즉 특별한 사람이다. 이들은  대다수가 모르는 특별한 지식을 소유한 사람, 이른바 ‘카인의 표적’을 지닌 사람이다. 데미안에서 카인의 표적은, 새로운 세상이 올 때 인류를 그 세상으로 이끌고 가야 하는 비범한 사람들에게 주어진다. 그들은 신적이거나 도덕적인 인격체는 아니지만, 새 세상을 열고 자신의 존재로 사람들을 매혹시키고 리드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들에게 끌리면서 동시에 두려워한다. 새로운 세상은 항상 안정된 세상의 파괴를 동반하는 법. 해리 포터가 두려움의 대상이 된 것은 잊고 싶은 볼드모트라는 존재를 각인시키기 때문이다.


경험상 이런 카인의 표적을 지닌 자들은 아래 두 가지 중 한 패턴으로 행동하는 것 같다.

자신을 특정 지식의 전수자로 규정짓고, 타인을 계몽의 대상으로 보는 게 한 방향으로. 이 관계에서 타인은 무지하기 때문에 도움을 필요로 하는 대상이고, 뭘 좀 아는 나는 이를 ‘안타까워’하는 구원자 역할을 한다. 상대방의 상황과 관계없이 안타까워하며 어떻게든 상대를 갱생하고자 대화를 강요한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이 안타까움에는 우월감이 있다. (그래서 실상 오만이나 오지랖에 가깝다)

또 다른 패턴은 이런 표적을 알아채고 다가오는 사람들과만 소통을 하는 것이다. 이 경우는 자신을 알리고 이해시키기 위한 노력이 필요없다. 상대방이 이미 나와 나의 관심사에 대해 알고 있으니까.

이런 패턴의 배경에는 타인에게 나를 이해시키기 위한 소통은 피곤한 것이라는 인식이 있다. 아들러의 관점에서 본다면, 소통의 거부는 타인과 나는 동등하지 않으며, 타인이 변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부인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상대방이 적 enemy이 될 수도 있다고 보는 것이기도 하다. 사실 이 부분은 ‘클레임’으로 실제 나타나기도 하는지라 무조건 적대적 세계관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완전한 타인에게 겁을 먹는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는 자본주의의 필수덕목, 마케팅이 소비자를 바라보는 시각이 오히려 더 바람직한 것이 아닌가 싶다. 마케팅팀에서는 항상 신상품이 나오고 이 신상품을 어떻게 커뮤니케이션 할 것인가 고민을 한다. 소비자에게는 그 자신도 미처 알지 못하는 욕구가 있다고 간주하며, 그 욕망을 어떻게 건드릴 것인가를 생각한다. 알면 충분히 달라질 수 있고, 좀 더 나은 삶(물론 물질적인 삶)에 대한 욕구가 있다고 본다.

마케팅 관점에서 일반인(일반 소비자라고 부른다)는 설득해야 할 대상을 의미한다. 당연히 이 상품에 대해 모르며 자신의 욕구조차도 모르기 때문에 그 근원 욕구를 깨워주어야 할 대상이다. 그러므로 제대로 알기만 하면 기꺼이 돈을 지불할, 소비 잠재력으로 간주한다. ‘이런 좋은 것을 모르니 안타깝구나’의 시선도 아니고, ‘모르니 소통을 하지 말자’의 대상도 아니다. 상대가 모르는 것은 당연하니 어떻게 하면 그 눈높이에 맞춰 소통을 할까를 고민한다. 영적 세계의 비범한 자들은 포기하는데 물질 세계의 마케터들은 소통을 고민하는 이 아이러니라니.

 

소통은 상대와 내가 평등한 존재일 때 가능하다. (회사의 간담회는 그래서 소통이라고 부르기 어렵다)

상대를 존중하거나 동등한 관계로 본다면 일반인이 아니라 가치판단이 제외된 ‘타자 Other’라고 부르는 것이 옳다. (왜 철학책에서 타자라는 용어를 사용하는지 비로소 이해한 1인)

타자는 ‘다른 사람 different person’과도 같지 않다. 타자는 나와 마찬가지로 개별성과 독특성을 가진 하나의 존재이며 이 사회에서 살아갈 권리를 지닌 인간 동료이며 육체와 영혼을 지닌 존재이다. 얼굴없는 N분의 1로 처리되어도 괜찮은 존재가 아니다. 사람은, 지식의 유무가 아니라 존재 자체로 인정받아야 한다.

당신과 나, 우리 모두는 타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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