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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혜령 Dec 28. 2015

푸른 거탑과 머리카락

                                                                          

한때  케이블에서 방영했던 '푸른거탑 시즌2'를 즐겨 보았다. 

메디컬 드라마 하얀 거탑을 패러디한, 이른바 '군디컬' 드라마로 내무반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상당히 리얼하게 보여주는 일종의 시트콤이다. 처음부터 이 프로그램이 인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원래는 '롤러코스터'의 20분짜리 파일럿 코너였지만 점차 인기를 얻으면서 정규코너로 자리를 잡았고 그러다 스핀 오프로 독립한 것이다. 출연 배우들도 자칭 B급 마이너리티, 중고신인인 개그맨들, 무명의 탤런트, 전직 매니저였다.  

 

내가 이 프로그램에서 가장 눈여겨 봤던 부분은, 바로 배우들의 헤어스타일이었다.

롤러코스터의 일부 코너였을 때 그들의 헤어스타일은 전부 가발이었다. 한눈에 봐도 가발임이 태가 나는  영구 스타일 말이다.그러다가 정규편성이 되기 시작하면서,  '말년' 최종훈과 '신병' 이용주의 헤어스타일이 가장 먼저 바뀌었던 것 같다. 가발을 벗고 자신들의 헤어스타일을 아예 군대 스타일로 바꾸어 버린 것이다. 그 다음에는 병장 김재우와 상병 김호창의 헤어 스타일이 바뀌었다. (순서는 좀 헛갈린다)

 

하지만 마지막 남은 일병 두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계속 가발을 사용해왔다. 

...극의 내용과 상관없이 이 두 사람이 언제쯤 자신들의 머리카락을 자를지 몹시 궁금해졌다. 

왜 그들은 가발을 사수하는 것일까? 이미 대부분이 가발을 벗은 상태인지라 저쯤되면 주변에서 압박이 들어올 것 같은데? 다른 곳에서의 출연때문에 원래 헤어스타일을 바꾸지 못하는 것일까? 나름 소신인가봐? 등등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괜히 내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어제, 드디어 이 두 사람이 가발을 벗고 헤어스타일을 바꾸었다. 

안도감과 아쉬움을 동시에 느꼈다.

 

공교롭게도 마지막 일병 두 사람의 극 중 존재감이 두드러지지 않는 편이라, 나는 이 '머리카락'과 존재감의 상관관계가 궁금해졌다. 

푸른거탑에서의 머리카락은 참여하는 배우들의 몰입도와 애착을 보여주는 증표였다. 

정규 방송도 아니고, 케이블 TV이니 인기있다 한들, 한계가 있다. 거기다 군인의 헤어스타일에 맞추면 여기에 출연하는 이상, 다른 프로그램에서 역할제의를 받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외모가 그들의 밥줄이니 제작사에서도 머리카락을 자를 것을 강요하지는 못했으리라. 

결국 배우들이 스스로, 이 프로그램에 배우로서의 생명을 건 것이다. 

B급 마이너리티인 그들은 어떻게든 주어진 기회를 통해 배우로서의 스스로의 가치를 확인하고 싶었으리라.

그렇게 최선을 다하는 마음 -그 상징이 아마도 머리카락이지 않았을까-이 극에서의 존재감으로 나타났을 것이다.그러면 마지막의 일병 두 사람은 존재감이 없었기에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았던 것일까, 

아니면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았기에 존재감이 없었던 것일까? 그들이 머리카락을 자르겠다고 결심을 한 이유는 또 무엇일까.

 

가발을 썼던 그들에게서 회사에서 근무했던 때의 내 모습을 본다. 어떻게든 희망을 가지려 노력했었으나 어느 한 순간부터 나는 회사의 사업정책에 대해 신뢰를 하지 않게 되었고 잘 해보고자 하는 마음을 놓아버렸다.  

자고 나면 생기는 TFT는 그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없어졌고, 탑 경영층은 무턱대고 쪼으기만 했다. 

회사 전체적으로 전문성이나 적재적소, 직급과 상관없이 아무일이나 시키는대로 닥치고 해야하는 상황이 되자, 그렇지 않아도 마케팅에 흰눈을 뜨고 보는 이 물에, 두 발을 다 담그고 사는 것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본능적으로 엉거주춤한 자세를 취하고 한 발을 뒤로 빼기 시작했다. 

이 상황에서 어떻게 '머리카락'을 자른단 말인가.  자발적으로 머리카락을 자르기는 커녕, 머리카락을 자르라는 무언의 압박 속에서도 꿋꿋이 가발을 쓰고 다닌 셈이다.  

가발을 썼기에 존재감이 없었던 것일까, 존재감이 없어서 가발을 썼던 것일까.

확실한 것은 이미 그곳에서의 존재감이 나에게는 의미가 없었다, 라는 것이고 그 마음가짐은 아마 나의 '헤어스타일'을 통해 누구나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다시, 푸른 거탑을 보면서 생각한다.

만약에 지금, 내가 아직 그 회사에 있다면 머리카락을 자를 것인가? 

남에게는 당연히 머리카락을 잘라야 한다고 얘기할텐데, 조직 생활은 철저히 머리로 하는 것이라면서.

하지만 정작 나의 경우, 내 가슴은 어리석게도 아직도 대답을 망설인다. 조직이 언제까지나 답을 기다려주지 않는 것을 알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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