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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혜령 Apr 05. 2017

창조성의 그림자, 자기파괴
: 상처받은 뱀파이어들에게

창조성 관련 코칭 수업에서 창조성이란 자기 삶에 대한 오너십이며,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것(아마도 feel alive쯤 되지 않을까)이란 설명을 들었다.

이 관점에서 본다면, 창조성이란 멈추어서는 안 되는 어떤 것, 자기 존재를 확인하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으로 정의할 수 있겠다. 서술어라면 ‘~ing’, 끊임없이 변주되는 에너지들의 움직임…그러고보니 윈도우에서 제공하는 3D 화면보호기 이미지가 딱 이에 해당한다.


가장 흥미로웠던 점은 창조성의 반대가 바로 파괴성이라는 내용이었다. 창조적 활동을 멈추면 그냥 그 상태로 고이 냉동되거나 시들해지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란다. 부정당한 창조성은 그만큼 파괴성향으로 나타나 사람을 덮친다고.


이 대목에서 ‘창조성을 저해하는 인물을 기록하라’던 모닝 페이지 과제가 떠올랐다. 처음에는 이전 회사의 인물 하나가 떠올랐다. 그러더니 갑자기 고구마 줄기처럼 이런 저런 인물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어머나, 나는 창조성 뱀파이어의 집단 속에서 살았던가

부정당한 창조성의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그 뱀파이어들은 동시에 상처받은 창조자들이기도 했다. 조직에는 상처받은 창조자들이 좀비처럼 꾸역꾸역 늘어났고 그틀은 안전한 방식, 힘있는 자의 말에만 동의했다. 그래야만 했을 것이다.


나는 그곳에서 마케터로서의 정체성을 잃고 좌절했다. 좌절하지 말고 끊임없이 노력하라는 것은 정말 이상적인 상황에서의 얘기다. 어느 한계점이 지나게 되면 그냥 포기하는 게 자신을 보호하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다. (물론 내게 정치력이 있었다면 좀 유연하게 대처했겠지만)


그 당시, 집에 돌아오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거실에 널부러져 TV를 보는 것만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책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럴수록 뭔가 자기 자신을 계발하는 일을 해야 하지 않을까, 자기계발 중독자답게 초조했지만 마음뿐이었다.

친구는 그런 나에게 "그렇게 쉬니까 그나마 다음 날 버틸 힘이 생기는 거 아니겠냐'고 위로를 해주었다. 그 말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그랬다. 집에 나를 꽂고 에너지를 끌어와야만 다음날 소진될 수 있는 힘이 생겼다. 오래된 스마트 폰의 방전율처럼 나의 방전율은 급격하게 올라가고 있었다.


당연히 분노와 좌절, 자학이 뒤따라왔다. 이런 감정은 자기파괴와 (힘있는 자의 경우) 타인의 파괴를 가져오는 데, 이렇게 되지 않으려면 우선 스스로의 인정이 중요하다고 한다. 어려운 시기를 견디기 위해서는 적절한 나르시즘도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때의 나는 그 시간들을, 글을 쓰면서 견디어냈다. 하루에도 열 번 이상,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스스로 감정이 올라와 견디기 힘들어질 때 무조건 온라인 일기를 썼다. 순간순간 오르내리는 감정과 느낌을 쏟아내는 것만이 겉으로 멀쩡한 얼굴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내 영혼이 자기파괴만큼은 어떻게 해서든 막으려 했던가 보다. 자기파괴로 이어지는 음산하고 어두운 골짜기를 나는 일기라는 초라한 등불을 하나에 의지해서 아슬아슬하게 빠져나왔던 것이다. 아마 그 기간이 더 이어졌다면 분명 몸과 마음에 병이 들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월급은 개개인의 생명 에너지에 대한 대가가 맞다.


이제서야 뱀파이어들의 안부가 궁금하다. 나의 상처를 핥는데 급급하여, 그들 또한 희생자였던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미안합니다. 동료 여러분. 처음으로 연민의 마음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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