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혜령 Feb 23. 2017

"바보야, 문제는 시스템이야"

왜 우리는 '누구'를 먼저 찾는가


B2B영업을 담당하는 후배에게서 매출 욕심에 사고를 친 것 같다는 전화가 왔다. 다소 무리한 약속을 한 것 때문에 두 회사 사이에 소송이 벌어지고, 극단적으로는 자사가 손해를 입을까 봐 걱정된다는 것. ‘회사에서 책임지라고 하면 책임져야죠’ 하기에 ‘책임을 어떻게 져?’ 했더니 사표를 쓰겠다는 결의에 찬 대답이 되돌아온다. 


사표를 쓴다고 해서 갑자기 송사에 이긴다거나, 벌금 등이 사라질 리 만무하다. 사실 사표제출은 당사자로서는 골치 아픈 일에서 빠지는 가장 손쉬운 해결책이다(월급에 대한 아쉬움만 빼면). 회사에 머물러 있으면서 그 일을 해결하기 위해 애쓰고 묵묵히 비난을 감수하고 -정적이라도 있으면 아주 피곤하다- 손가락질의 시간을 감내하는 것이 더 어렵다. 여기에 나쁜 고과까지도 의연하게 감수하는 태도는 옵션. 


책임을 진다는 것이 사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문제가 터지면 우리는 습관적으로 누구의 잘못인가를 찾는다. 말로는 ‘누구’의 잘못인가가 중요한 게 아니라면서도 그렇다. 그나마 회사 내에서 평판이 좋은 사람이라면 다행이다. 조직 내 아군이 없는 사람은 이 고비를 무사히 넘어가기 어렵다. 책임을 운운하며 은근히 사표를 조장하는 분위기를 만드는 호사가들이 있다. 그들에게는 누군가 상처를 입고 나가 떨어지는 것, 패배하는 모습을 보는 것, 큰 코 다치는 것이 재미있는 일이다. 


왜 그렇게 우리는 책임자를 찾는 것일까. <어쩌다 한국인>은 그 이유를 '나쁜 놈 한 명만 잡히면, 문제가 해결됐다고 만족하는 한국 사회에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으며 이 문제는 '한국인의 관계주의적 특성과 관련되어 있다' 고 설명한다. 


관계주의적 특성 중의 하나는 상황에서 행동을 선택할 때 '일관성보다는 상황적 요인', 전후 '맥락을 고려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한국인에게 거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 즉, 누구랑 같이 있느냐'이다. 거기에 따라 행동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부모와 있느냐, 상사와 있느냐, 친구와 있느냐) 

그러다 보니 문제가 발생했을 때 시스템이나 구조 같은 객관적인 팩트에서 사건의 원인을 찾고 대책을 세우기 보다는 사람에게서 원인을 찾고 사람을 바꾸면 된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런 사고방식은 회사에 위기가 생겼을 경우 -매출이 잘 되도 위기, 매출이 안 되도 위기라는 게 함정이다만- ‘CEO부터 사원까지’ 사람을 싸그리 바꾸는 것으로 나타난다. 우선 CEO가 바뀐다. 위기라며 창업자의 후손이 취임해서는 이제 다 싹 뜯어고칠 것이며 매출과 이익이 오를 것이라고 선언한다. 하지만 가내수공업도 아니고, 비슷비슷한 경영철학을 가진 CEO가 등판한다 해서 회사가 일시에 바뀌어진다면 그거야말로 회사 자체가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는 거다.  


상부가 바뀌고 나면 하부 조직에서 피바람이 분다. 전 CEO가 채용한 사람들은 일시에 해고대상에 오르고, 조직의 수장들은 살생부에 이름이 오르내리며 ‘똘마니’ 급인 병사들은 정신무장이 덜 되었다며 고된 강도의 ‘혁신 프로그램’에 소환된다. 정말 CEO들은 혁신 프로그램에만 참여하면 조직원의 ‘썩어빠진 정신’들이 싹 개조되고 일을 열심히 하면 위기에서 벗어난다고 믿는 것일까. 아니, 조직원들이 게을러서 회사가 위기에 빠졌다고 보는 그 관점 자체가 이미 낡은 것 아닌가. 


사원 시절 2주일 만에 세 번, 연속적으로 인쇄 사고를 낸 적이 있다. 아무리 확인을 해도 어느 과정에서인가 바코드 숫자가 바뀌어 인쇄가 되는데 정말 귀신에 홀린 것 같았다. 수습보다 정신을 어디에 두고 사냐고 야단할 상사들의 꾸중이 두려웠다. 즉, 나 개인의 잘못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세 번 문제가 생기자 상사는 이것이 시스템의 문제라고 판단했다. 관련 부서가 모여 프로세스개선을 논의했다. 개인을 비난하지 않는 분위기가 되니 이 사건을 가장 잘 알고 있는 내가 안심하고, 가장 열심히 개선안 수립에 참여할 수 있었다. 

만약 이때 상사가 나의 책임으로만 몰고 비난했다면 궁지에 몰린 나 또한 무고함을 주장하며 다른 희생자를 찾았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이때 상사의 대처방식이 고맙다. 


회사를 성장/유지시키는 요소로서 인력은 중요하다. 그러나 인력은 회사의 시스템을 기반으로 움직이면서 성과를 창출하는 존재이지, 없는 시스템을 몸으로 대체하거나 수정하면서 움직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개인의 행동을 특정하게 유도하는 구조나 제도의 문제점을 파악해야지 그것은 그대로 둔 채 조직원의 정신만 바뀌면 모든 것이 바뀐다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 결국 사람은 시스템을 따라가게 되어 있다. 그게 회사가 선진 시스템을 곁눈질하면서 컨설팅을 받고, 굳이 외부 회사의 인력을 수혈하는 이유다. 문제는 시스템이다. 사람 탓을 하고 싶다면 시스템의 창조자이자 스위치를 쥐고 있는 리더자신의 경영철학을 되돌아 보는 게 맞다. 



매거진의 이전글 생긴 대로 사는 것의 고단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