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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혜령 Oct 30. 2017

어른이 되어간다는 것

외삼촌이 내개 남겨주신 것


1. 

나이를 먹었다는 이유만으로 어른으로 대접받는 것은 두렵다. 

어른이라 하면 나이에 걸맞는 연륜은 물론이요, 공평무사함,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지니고 있다는 뜻일 텐데, 요즘 세상에는 저렇게 나이들면 안 되겠다는 케이스는 많아도 저렇게 나이들고 싶은 롤모델들은 극히 드문 듯. 

정신이 충분히 성숙하지도 않았으며, 내 앞가림도 하기 힘든 처지에서는 단지 나이를 근거로 어른을 자처하기도 어른 대접을 받기에도 마음이 불편하다. (그래서 나는 ‘선배’ 혹은 상호간 ‘선생님’이라는 호칭이 좋다. 그건 그냥 주어진 각자의 길을 열심히 걸으면서 동등하게 삶의 애환을 나눈다는 느낌을 준다.)

어른 노릇은 버겁다.


2. 

이주 전 셋째 외삼촌이 돌아가셨다. 그 집 딸들과 우리 자매가 각별히 친한 덕에 셋째 외삼촌이 다른 친척보다 상대적으로 가깝게 느껴지긴 하지만, 가끔이라도 찾아 뵙고 (뻔한) 말씀을 들을(=견디어 낼)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두 자리 수의 세월이 흐를 동안 가끔 안부를 묻고 ‘여전하지 뭐’ 라는 얘기를 듣는 것으로 끝. 장례식에 간 것은 조카의 도리, 그 보다는 나의 친구이기도 한 사촌들에 대한 위로의 마음 때문이었다. 


3. 그런데, 

‘외삼촌이 너를 얼마나 자랑스러워 했다고…’ 

외숙모가 다가와 나를 안아주면서 건넨 말이 갑자기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아, 외삼촌은 나를 이렇게 보고 있었던가. 감사와 미안함이 울컥 솟아올랐다. 

그제서야 외삼촌이 친척의 테두리를 넘어, 개성과 인격을 가진 또 다른 인격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외삼촌은 나를, 신통찮은 조카가 아니라 그 결과와 상관없이 자신의 세계와 자신의 길을 가고 있는 성인으로 인정했던 거구나. (어렸을 때부터의 부실한 성장과정을 봐온 친척에게 이런 인정을 받기란 어렵다). 앞으로도 나는 이 말을 되새기며 힘을 얻겠지. 그렇게, 장례식장에서 외삼촌은 비로소 내게 ‘어른’이 되었다. 


4. 

미드 ‘지정 생존자 The Designated Survivor’의 에피소드 중 하나. 

대통령 아버지를 둔 오케스트라 연주자인 아들은 바쁜 아버지의 무관심이 서운하지만, 상황을 이해하기에 서운함을 내색하지 않는다. 심지어 아버지의 급작스러운 사망 이후에도. 그러다 후임 대통령에게서, 연주회 날 사실은 아버지가 자신의 연주를 몰래 들으러 갔으며, 국무위원들에게 리플렛을 나누어주고 자랑했다는 얘기를 듣는다. 반신반의하는 그에게 아버지가 싸인한 리플렛을 보여주는 후임 대통령. 그 리플렛을 보면서 아들은 냉정한 태도를 벗고 가슴에서 우러나온 눈물을 흘린다. 아마 그는 그제서야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있었을 것이다 (홍길동과는 다른 차원에서)


5. 어른 노릇은 어렵다. 미룰 수 있으면 미루고 싶다. 그렇지만 외삼촌의 장례식에서 나는 어렴풋하게나마 한 가지 힌트를 얻은 것 같다. 

뭘 가르쳐야만 한다는, 즉 훈수를 둬야 어른이라는 생각에는 ‘너는 틀렸다’와 자신의 삶이 보편적,이라는 타인의 삶에 대한 예의가 배제되어 있다. 과거 내 삶의 공식이 현재에도 유효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사실은 내 시야의 좁음을 고백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나마 좁아터진 우물 하나라도 판 것은 걍 운이 좋았기 때문이다) 

이미 유효하지 않은 나의 경험을 바탕으로 타인의 우물파기(저수지가 될 수도 있는 일 아닌가!)를 재단하려 하지 말고. 그저 같이 삽질을 해주거나, 응원, 하다못해 암묵적 지지라도 하는 것이 먼저 산 자의 도리가 아닐까.  


…나는 내 우물도 못 판지라 더불어 삽질을 할 능력은 없지만, 폼폼을 흔들면서 응원은 할 수 있을 것 같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긴다면 배고픈 후배들에게 맛있는 밥이라도 대접하면서 고단한 삶의 얘기를 들어주고 싶다. (입은 다물고)  나와 다른 삶의 치열함과 고단함을 위로하는 것, 그리고 ‘답정너’나 ‘넌씨눈’을 삼가하는 것.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어른 노릇이 아닐까 싶다. 삶이 나이를 가려가며 그 무게를 조정하는 것은 아니니까. 


어른노릇에 대한 힌트를 남겨주신 외삼촌, 그 분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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