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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혜령 Jan 23. 2018

'끓는 점'을 만나는 행운에 관하여

feat.'슬기로운 감빵생활'

슬기로운 감빵생활에는 여러 흥미있는 캐릭터가 등장하는데, 내가 가장 몰입했던 캐릭터는 주인공의 친구로 등장한 이준호 교도관(정경호 분)이다. 그는 과거, 뭘 해도 잘 했던 인물이다. 초등학교 시절 주인공이 그렇게 실패했던 깡통 맞추기도 한 번에 성공시켜 주인공을 좌절시키고, 야구를 그만둔 후 단지 1년만의 열공으로 무난히 대학에 진학한다. 한때 대학친구들과 지하철앱을 개발하기도 했지만 미련없이 그만둔 전적이 있고, 현재는 교도관으로 일하는 중. 하지만 교도관에도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임용을 준비할까 고민하는 인물. 

교도관으로서 그는 ‘차갑다’. 회식에도 잘 참여하지 않고 수용자는 규칙대로 번호로 부르며, 팽부장의 반말, 욕습관에 치를 떠는 ‘우아한 스타일’. 일에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그는, 그러니까 내 식대로 말하자면 일에서 ‘끓는 점’을 찾지 못한 사람이다.


끓는 점은 액체가 기체로 바뀌는 온도. 즉 한 본질에서 다른 본질로, 영원히 되돌아올 수 없는 변형이 일어나는 지점이다. 커리어의 관점에서 ‘끓는 점’이란 마침내 가슴이 뛰는 분야를 발견하는 것이 될 수도 있고, 어떤 사건을 접해 삶의 소명을 깨닫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끓는 점을 통과한 사람은 이전처럼은 살 수 없다는 거.


친구 김제혁이 감빵으로 들어오면서 이준호의 '거리감을 추구하는 삶'은 달라진다. 

그는 친구때문에 감방안에서의 삶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리고 건달이 의로운 투쟁을 하다 감옥에 들어온 신부의 절룩이는 다리를 비웃는 장면에서,  비로소 그는 자신의 끓는 점을 만난다. 이준호의 '우아한 스타일'을 알아챈 건달은 자신이 신부를 괴롭혀도 이준호가 묵과할 것이라고 생각한 바로 그 지점에서 이준호는 끓어오른다. 그의 눈은 분노로 타오르고, 거친 소리로 욕을 하며 발차기로 건달을 응징한다. 이후 그의 교도관으로서의 삶은 완전히 달라진다.


같이 있음에도 불구, 커피조차 건네지 않고 꼬박꼬박 번호로 호칭하던 법자와도 가까워지고 수용자에 대한 공부를 새로 시작하는가하면, 절대 참여하지 않던 교도관들간의 회식도 참여한다. 그저 닮지 않아야 할 모델로만 여기던 팽부장에게서 진심을 읽게 되면서,  그는 점차 ‘도둑놈’, ‘범죄자’들과 관계를 맺게 된다.

드라마의 마지막 그토록 치를 떨던 팽부장을 닮은 모습으로 각 감방을 점검하던 이준호가 폐방을 외치는 장면애서 끝난다. 아마 더 이상 임용고시를 준비하지는 않으리라. 그는 그의 일에서 끓는 점을 만났으니까.


나의 오랜 조직생활에서 가장 아쉬운 부분이 바로 이 끓는 점이다. 

마케팅 일과 잘 맞았고, 좋아했고 가끔씩 잘한다고 생각했지만-뭐 이정도의 자뻑은 삶의 윤기 아니겠는가- 그 좋아함의 정도가 결코 어떤 선을 넘지 않았던 것 같다. 어떤 하나에 집착해서 깊이 파고들지도 않았고 이준호처럼 드라마틱한 어떤 사건을 겪고 각성을 하는 행운도 없었다. 고백하건대 나는 항상 99도였다. 어쩌다 스스로를 독려하여 남의 인정과 상관없이 조금 끓어오르려 하면 꼭 찬물을 끼얹는 윗사람이 있었다. 나의 잘못은 이에 굴하지 않고 독자적 노선을 걸을 만큼의 간담까지는 없었다는 거다.  


조직이 나를 돌봐준다는 허황된 기대는 애당초 없었고, 조직에서 출세할 인물타입이 아님은 신입사원때 일찌감치 깨달았으니 월급쟁이 생활을 하는 동안 향후의 먹거리를 발견해야 마땅한데, 시간이 지나도 미적지근하기만 하니 그 시간이 늘 초조했다. 일을 하는 과정에서 뭔가 끓는 점을 발견하겠거니 했는데 왠걸 끓는 점은 발견하기는커녕 나는 차가워져만 갔다. 단지 월급을 받기 위해 하는 일에서 무슨 즐거움을 찾을 수 있을까. 조직에 대한 정서적 애착을 높이기 위해 고양이라도 입양, 돈을 버는 자로서의 가장의  책임감을 더 높여야 하지 않을까도 진지하게 고민한 적이 있다. 그러나 나는 고양이 화장실 청소를 감당할 자신이 없으므로 이 옵션은 패스.


끝끝내 끓는 점을 발견하지 못한 채, 시급히 집어든 창업 아이템을 들고 회사를 그만두었다. 회사에 미련은 없으나 오랜 조직생활에서 끓는 점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내가 실패자, loser라는 자책감에 오랫동안 시달렸다. 이 자책감을 위로해준 건 <미생>의 마지막 부분이었다.

<미생>전 편에서 장그래는 자신이 프로기사가 되지 못한 이유를 끊임없이 자문한다. 마지막 부분에서 마침내 그는 ‘승부를 결정하는 그 순간, 불을 꺼내지 못해 프로가 못’ 되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나의 바둑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선언한다. 아직 불을 꺼낼 일이 남아있기 때문이리라.


장그래처럼 젊지는 않지만, 아직은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아직 나의 ‘끓는 점’을 찾지 못했다. 그러므로 나의 커리어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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