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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혜령 Feb 15. 2019

'밥은 먹었니?'

1.

몇 년 전, 지인 S와 비합리적인 두려움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굶어 죽을까 봐 두렵다’라는 고백을 한 적이 있다. 죽음이 두렵다기보다는 삶의 최소요건인 이 본능조차 최소한으로도 충족시키지 못할 만큼의 경제적, 사회적 곤궁한 상황이 두렵다는 의미이다. (실제로 21세기에 굶어 죽기야 하겠냐고 웃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는 진지하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나라의 도움으로 오로지 끼니만을 해결하고 살거나, 주변에 갚을 길이 없는 민폐를 끼치면서까지 살 마음은 없지만 아무튼.)


두려움의 이유가 ‘굶는다’로 표현된 만큼, 내 안에는 ‘결핍’이 또아리를 틀고 입을 벌리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결핍이 내가 넘어야 할 가장 원초적이고 큰 허들이 아닐까 싶었다.


2.

어…그런데, 그러나, 그렇게 확신했던 결핍이 나에게 없다니, 외려 당황스럽다.

그럼 내가 붙잡혀 있었던 혹은 붙잡고 있었던 것은 무어란 말인가. 차라리 '결핍감이 매우 크다'라고 하면 납득하기 쉬웠을 것이다. 나는 “그럴 줄 알았다”며 잔뜩 탄식할 준비가 되어 있었으니까. 그런데 엉뚱하게도 ‘아니’라는 진단을 받고 보니 어쩐지 머쓱하다. 그 민망함에 없던 사실도 애써 만들어낼 판국이다.


아주 단적인 예로, 나는 다이어트의 잦은 실패를 합리화시키는 요인으로 ‘결핍’을 짐작했었다. 언젠가 다가올 곤궁함에 대비해 몸이 들어온 음식을 저장하고 쌓아두며 내보내지 않으려는 것이 틀림없다, 그러므로 나의 다이어트는 결코 성공을 할 수가 없다, 이런 논리를 내세우며 달콤한 슬픔을 느끼곤 했는데 된장, 나는 그저 먹을 이유가 필요했던 것뿐이었던가.


3.

엊그제 십년지기 K실장님을 만났다.

최근의 좋은 성과를 축하하며 저녁을 먹으러 이동하던 중

“돈 벌고 나면 (내가) 밥은 잘 먹고 다니는지, (나에게) 맛있는 걸 먹여야 한다는 생각이 떠오른다”는 걱정어린 말을 들었다. 그러고보니 또 다른 지인 P도 만날 때마다 끼니꺼리를 걱정하며 ‘밥은 먹었는지’를 묻는다. 그 순간, 그 마음들이 와 닿았다.


‘식사하셨냐’는 타인을 만날 때의 의례적 인사말이다. 사실 그대로 ‘안 먹었다’라는 대답은 오히려 상대방을 당황스럽게 할 뿐이다. 그러므로 아무에게나 밥을 먹지 않았음을 실토하지 않으며, 아무에게나 무엇을 먹었는지를 진심으로 궁금해하지 않는다. 연민의 마음만이 타인의 한끼를 진심으로 걱정한다.


나는 결핍은 커녕, 분에 넘치게 좋은 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 지인들이 있는 한 적어도 굶어 죽지는 않으리라. 그렇구나. 그랬구나. 좋은 일이긴 한데… 나름 결핍을 무기처럼 휘두르고 있었는데 사라지고 나니 좀 허탈하다. 더 이상 다이어트 실패에 대해 스스로를 속이지도 못하겠지. 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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