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말을 듣자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5분가량의 짧은 다큐멘터리 영상을 제작할 때의 일이다. 인터뷰이는 자살시도를 했던 16살 여자아이. 지금은 비슷한 아픔이 있는 청소년들을 상대로 지원 활동을 하는 아이였다. 장문의 편지와 함께 기획안을 첨부해 메일로 보냈는데 내 진정성을 좋게 봐준 모양이었다.
한편으로 걱정스러운 마음도 고개를 들었다. 카메라 앞에서 인터뷰한다는 것이, 그것도 자신의 상처를 드러낸다는 것이 얼마나 큰일인지 짧은 경험으로나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혹시나 내 영상이 민폐를 끼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있었다. 게다가 이미지로 소비되는 것이 싫어 한 방송사의 출연 요청을 거절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터라 일종의 사명감까지 생긴 상황이었다. 유튜브 영상을 만들면서 했던 길거리 인터뷰와는 다른 압박감이 느껴졌다.
인터뷰 당일까지 남아 있는 시간은 7일. 나는 그녀와 관련한 자료를 긁어모아 정독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등장했던 유튜브 영상도 반복해서 보면서 인터뷰 질문들을 점검했다. 과연 이 질문들이 내 기획의도를 표현할 수 있는 질문들인지, 내가 생각하는 영상의 구성에 어울리는 것들인지, 인터뷰이의 속마음을 끌어낼 수 있는 질문들인지. 머릿속으로 끝없이 상상했다. 하지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과연 이 글자 그대로 질문만 한다고 해서 인터뷰가 잘 될까?'
다큐멘터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있다면 출연자와의 인터뷰다. 출연자의 인터뷰 내용에 따라 작품의 수준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전문가와의 인터뷰는 오히려 쉬운 편이다. 그들은 인터뷰 경험도 많고 자신의 전문 지식을 말하는 것에 큰 어려움을 느끼지는 않는다.
다만 보통 주인공이 되는 경험 당사자의 인터뷰는 보다 세심해야 한다. 만약 그 사람이 중심이 되는 휴먼 다큐멘터리라면 그와의 인터뷰가 곧 작품의 수준을 결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특히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이 되는 사람들은 상처가 있거나 힘든 상황에 놓여 있는 경우가 많다. 이 경우 PD는 결국 그들의 상처에 대해 물을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아무리 주의를 기울이더라도 인터뷰에는 가학적인 측면이 존재한다. 그러한 측면을 최소화하기 위해 세심하게 인터뷰이에 접근해야 하는 것이다.
결국 인터뷰는 하나의 관계 맺기다. 사람 사이 관계가 수많은 요인에 영향받듯이 인터뷰에서도 따져봐야 할 것들이 많다. 주인공과 사전 인터뷰를 할 것인지, 카메라는 언제부터 킬 것인지, 질문지를 미리 알려줄 것인지, 상처와 관련한 질문을 어느 타이밍에 꺼낼 것인지 등 많은 것을 고려해야 한다.
하지만 당시에는 처음 영상을 만드는 어설픈 초보 다큐멘터리스트였기 때문에 딱 두 가지 만을 마음에 새기고 가기로 했다.
-PD는 인터뷰이가 솔직하게 자신의 얘기를 꺼낼 수 있게 그의 신뢰를 얻어야만 한다. 인터뷰이 역시 PD가 만들고자 하는 작품의 기획의도에 공감해야 하며 그가 자신의 말을 왜곡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생겨야 한다.
이런 신뢰 형성은 보통 인터뷰 전과 진행 과정 중에 이루어진다. 인터뷰 당일, 나는 약속 시각보다 세 시간 먼저 인터뷰이를 찾아갔다. 인터뷰이가 참가하는 행사에 같이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덴마크 대사관에서 청소년 정신건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였다. 그때 처음으로 인터뷰이와 인사를 하고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일상적인 이야기들이었지만 서로가 익숙해지는 시간이었다.
인터뷰 공간도 미리 물색하여 최대한 조용한 공간을 예약했다. 카메라 녹화 버튼을 누르고서도 나는 인터뷰를 바로 시작하지 않고 내 이야기를 먼저 하기 시작했다.
"저는 ○○님의 이야기를 통해 정신적 어려움을 겪는 청소년들에 대한 편견을 해소할 수 있는 영상을 만들려고 해요. 제가 가르쳤던 과외 학생이 정신적인 어려움을 겪었던 일이 계기가 되었어요." 인터뷰이가 카메라에 익숙해지도록 시간을 주려고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내 진정성을 알아주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한 말이었다. 10분 뒤, 이번에는 그녀가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인터뷰는 절대 자신이 예측한 방향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인터뷰이의 대략적인 상황은 알고 갈 수 있지만 그가 무슨 말을 언제 어떻게 할지는 예측할 수 없다. 인터뷰가 단순히 질문과 답변이 아닌 '대화'가 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런 탓에 인터뷰 질문의 순서를 대화의 맥락에 맞춰 즉석에서 바꿔야 하는 경우가 많다.
인터뷰 과정에 대해서는 우연히 본 장강명 작가가 쓴 '취재 방법'과 관련한 글이 도움이 되었다. 작가는 인터뷰에서 '왜'를 강조한다. 보통 인터뷰를 하고 나중에 확인해보면 막상 영상에 쓰기에는 너무 단조롭거나 의미 없는 말인 경우가 많아 당황하게 된다. 사실 진짜 대답을 듣지 못했는데 대답을 들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언제 가장 행복했나요?"라는 질문에 주인공이 "그녀를 만났을 때요."라고 대답했다고 해보자. 이 말로도 어떠한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더 깊이 있는 질문을 하기 위해서는 멈춰서는 안 된다. '왜'를 파고들어야 한다. 왜 그녀를 만났을 때가 어느 때보다 기쁜 때였는지, 혹시 오랫동안 운명의 상대를 기다려왔던 건지, 왜 그 기다림이 간절했는지 등, '왜'에 대한 질문을 더 던져야만 인터뷰이의 진짜 속마음에 가까워지는 것이다.
이렇게 영상을 몇 번 제작하고 나면 지금까지 보아왔던 TV 프로그램이 조금은 달리 보인다. 특히 다큐멘터리의 경우 그 주인공에게 눈길이 간다. "대체 저 사람을 어떻게 섭외했지?"라는 말이 자연스레 떠오르고 주인공의 진솔한 말과 표정에 감탄한다.. 시청자는 편안한 의자에 앉아 주인공의 사연을 지켜본다. 하지만 주인공이 카메라 앞에 서서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꺼내 놓을 때까지의 과정은 생각보다 만만치 않다. 한 예로, 최근에 방영되었던 다큐멘터리 <성여>는 화성 8차 사건 범인으로 30년을 살아온 윤성여 씨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해당 PD는 사보에서 윤성여 씨가 카메라 앞에서 본연의 모습대로 행동할 때까지 두 달이 필요했다고 밝혔다. 큰 상처에는 큰 각오도 필요하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내 첫 영상의 경우 설렘이 컸던 만큼 아쉬움도 컸다. 인터뷰를 끝내고 와서는 '아 이거를 그때 물어봤어야 하는데!'라며 후회도 했다. 하지만 동시에 다음번에는 더 잘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영상을 하나 제작하고 나면(인터뷰를 하고 나면), 내가 보는 세상은 달라져 있다. 하나의 세계를 보고 왔기에 이전과는 다른 내가 존재한다. 이는 PD뿐만 아니라 다큐멘터리를 보는 시청자도 마찬가지일 것이라 생각한다. 이 때문에 이제 '인터뷰 어떠세요?'라는 말을 보다 무겁게 받아들인다. 하나의 세계와 만나려면 그에 걸맞은 예우를 갖춰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