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을 듣는 시간
학부 시절, 봉사활동으로 장애 학생 도우미를 하면서 여러 부탁을 받았었다. 그중 가장 당황스러웠던 건 상원 씨(가명)의 부탁이었다.
"같이 놀이공원에 가주세요."
커다란 덩치에서 나오는 중저음이 예사롭지 않았다. 상원 씨는 성악을 전공하는 대학원생이었다. 실력도 꽤 좋은지 한 교육단체에서 장학금을 받게 됐다. 그 교육단체에서 친목 도모를 목적으로 1박 2일로 놀이공원에 가는데, 상원 씨는 여기에 꼭 참여하고 싶다고 말했다.
다만 상원 씨에게는 눈이 없었다. 말 그대로 안구가 없었다. 희소병으로 어릴 적부터 앞이 보이지 않았고 20세에는 안구를 적출 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런 그가 무사히 놀이기구를 즐기기 위해서는 옆에서 자신을 보조할 도우미가 필요했다. 상원 씨의 이야기를 듣고 처음에는 망설였지만, 높은 시급을 준다는 말에 기꺼이 내 24시간을 그에게 바치자고 결심했다. 평소보다 조금만 더 배려하면 큰일이야 있겠나 싶었다.
상원 씨와 함께 간 놀이공원은 특이했다. 남자끼리 손을 잡고 놀이공원을 누빈 건 처음이었다. 상원 씨의 덩치 덕분에 마치 커다란 곰 인형과 손을 잡고 다니는 느낌이었다. 눈이 보이지 않는 상원 씨는 주로 몸으로 느낄 수 있는 놀이기구를 선호했다. ‘사파리 탐험’처럼 눈으로 동물을 봐야 즐길 수 있는 놀이기구는 그에게 별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빙글빙글 돌아가는 컵이나 앞뒤로 흔들리는 바이킹을 탈 때면 여느 20대처럼 깔깔대고 웃었다. 다행히 상원 씨는 즐거워했고 우리 사이도 한층 가까워졌다.
문제는 뒤풀이였다. 교육단체는 레크리에이션 강사를 초청해 강당에서 뒤풀이 자리를 마련했다. 한껏 들뜬 나는 피곤하다는 상원 씨를 설득해 뒤풀이에 참석했다. 상원 씨가 다른 사람들과도 어울릴 수 있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곧 나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레크리에이션 강사가 진행하는 게임이 모두 시각을 전제로 한 게임이었기 때문이다. 상원 씨에게 진행 상황을 설명해보려고 했지만, 강사가 말하는 속도를 따라갈 수는 없었다. 주위 사람들이나 관리 선생님도 난감해할 뿐, 별다른 방도가 없는 듯했다.
방으로 돌아온 나는 머쓱해서 상원 씨의 눈치를 봤다. 나로서는 그를 배려한다고 뒤풀이에 데려갔지만, 오히려 그의 결핍이 두드러지는 순간이었다. 그는 일상에서 이러한 순간을 수없이 마주쳤을 터였다. 방으로 돌아와 침묵을 깨고 내가 사과를 하려는 순간 상원 씨가 먼저 말을 꺼냈다.
“좋은 목소리를 들었어요.”
뜻밖의 말이었다. 그는 뒤풀이 내내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그에 따르면 꽤 예쁜 목소리였다고. 아마 같은 조가 된 사람 중 하나였을 것이다. 나는 그의 반응에 멍해졌다. 내가 그의 결핍을 보고 있는 순간에 그는 타인을 듣고 있었다. 오히려 볼 수 있었기에 나는 멋대로 그의 시간을 잘못된 시간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충분히 상원 씨를 배려하고 있다고 생각한 건 내 착각이었다. 나 역시도 내 기준만으로 상원 씨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상원 씨는 그저 상원 씨였다. 그는 불이 꺼진 방에 누운 채 예쁜 목소리에 대해 수다스럽게 이야기했다. 바이킹을 탈 때만큼 신난 목소리였다. 나도 그의 목소리에 집중하며 뒤늦게 상원 씨에 대한 질문을 쏟아냈다. 그 순간만큼은 온전한 그와 마주한 느낌이었다. 달빛이 한창 밝을 때, 상원 씨는 어느새 잠이 들었다. 나는 달빛을 피하려고 눈을 감았다. 상원 씨의 중저음이 여전히 들리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