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5시 어스름해서 아직 밤 같은 이 시간, 내 옆에 엉켜져 있는 두 아들들 이불을 잘 덮어주고는 안방을 나선다. 2020년부터였을 거다. 지금은 나의 작업 공간이 바뀌었지만 당시 나는 컴퓨터가 있는 방을 향했다. 차가 쌩쌩 다니는 도로 건너편에 산이 있고, 주택이 있었다. 해가 뜰 무렵 분홍빛, 자줏빛이 도는 하늘의 모습을 보고 나는 퍽이나 감동에 젖었던 기분이 들었다.
이 시간이 되면 오감이 둔한 나도 고요함 속에 깨어나는 기분이 든다. '새벽 이 시간에는 역시 커피보다는 차 한잔이지'하며 티타임의 사치를 부리려고 한다. 그때 가스레인지 불의 시퍼런 불도, 불 위에 폴폴폴 물이 끓어가는 소리도 귀에 들어온다. 낮에는 분명 잘 느껴지지 않았던 거실 작업 테이블 위 꽃 향기도 향긋하게 내 코 끝을 맴돈다. 무엇보다 나는 이 시간, 이 어스름한 시간을 더욱 느끼고 싶어 거실 조명을 다 키지 않는다. 작업 테이블 위에 LED 등 하나, 그리고 따스한 노란빛이 도는 아트월 전용 등만 켠다. 조명 하나의 차이인데 거실 전체 등을 켜고 나면 뭐랄까, 이 시간이 낮시간과 다른 게 없어지는 기분이 든다. 마치 신데렐라 12시 현실 자각 타임을 맞이하는 기분이 든다고 해야 할까? 우선 밝아지면 당장에 어질러진 거실의 정리정돈 상태가 눈에 들어와서 마음이 불편하다. 내가 좋아하는 이 시간, 딱히 내가 선호하지 않는 일로 채우고 싶지 않다.
원하는 어스름한 조도에 폴폴폴 끓인 물로 우려낸 오설록 동백꽃 티의 수증기가 내 안경을 마구 가린다. 게다가 내가 좋아 아는 이사오 사사키의 Moomriver의 파도소리가 스피커로 선율이 흘러나온다. 살면서 이렇게 나를 위한 정성스러운 시간을 마련했더 적이 있었던가. 생각해보면 이 시간을 내가 좋아하게 된 것도 스스로를 위해 애쓰는 시간이어서가 아닐까? 는 평소 누군가를 만나면 다분히 그 사람에게 맞춰주려 한다. '엄마'라는 타이틀을 달고나나 더더욱 스스로에게 쓰는 시간이 야박해졌다. 그런데 새벽 5시, 가족의 일상과는 무관한 이 시간에 나는 오롯이 나를 마주하고 나를 돌보아주었다.
한때는 <미라클 모닝>이란 책을 읽고 새벽 4시 반에 눈을 떠서 무엇인가 생산성 있는 일들로 새벽 시간을 채우고 싶었던 적도 있었다. 뭔가 엄마의 역할로만 내가 채워져 스스로가 옅어질 새라, 그 시간을 붙잡았다. 그렇게 보내고 나면 나 역시도 책 속 '성공'에 걸맞은 사람이 되어만 있을 거 같았다. 하지만 지난해 읽었던 한 권의 책이 나의 어스름 시간의 용도를 달리하게 해 줬다. 시한부 일상을 다룬 에세이집 <새벽 4시 살고 싶은 시간>을 보면서였다. 미래를 위해 내가 삶의 의지를 불태우며 일어나는 그 시간이 누군가는 고통을 감내하며 하루를 버티며 하루를 또 그렇게 바라는 시간이란 것을 깨닫자 나는 그 시간을 하루하루 애쓰는 '나'를 위한 시간으로 채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하는 책도 읽고, 내 머릿속에 엉켜진 생각의 실타래도 풀어낸다. 노란색 A4 사이즈 줄 노트에 그야말로 아무 말 대잔치로 내 생각들을 풀어내 보면 일상의 여러 일로 둘러싸여 덮어두어 나 조차도 보기 내밀했던 내 감정을 마주한다. '자격지심' , '시기심', '질투' 일상에서 느껴진 이 감정을 모른 채 외면했지만 노란 노트에서만은 내 날것의 감정이 드러난다. 내 감정을 마주하고는 달래주고 인정해준다. 누군가에게 말하지 않았지만 스스로에게 위안받는 기분, 제법 꽤 괜찮다. 오늘 물어봐주시라.
당신은 기분은 어떠한가? 당신은 무엇을 좋아하는가? 미래의 성공한 나 역시 현재의 미소 짓는 나를 건너뛸 수는 없을 것이다. 새벽 5시 어스름한 이 시간, 나의 VIP는 바로 나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