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일했던 몇 년 동안의 경험에 대해 나는 감히 '이보다 좋은 팀은 없다'라고 말하고 싶다.
나의 매니저는 사실 그전 회사에도 나의 상사였다. 그녀가 회사를 옮긴다며 작별 인사를 했을 때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나는 진작부터 그 회사에 가고 싶었다고, 자리가 생기면 꼭 나에게 알려달라고. 그녀가 회사를 옮긴 지 2년쯤 되었을 때 팀원을 뽑는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첫 번째 인터뷰 때는 임신 상태였지만, 글로벌 경제 위기 때문에 1년 반 동안 회사는 채용을 멈추었고, 나는 아들을 낳고 한참 지나서 두 번째 인터뷰 사이클을 통과해 겨우 입사할 수 있었다. 두 번의 사이클을 합치면 무려 총 12번의 인터뷰와 4편의 작문 테스트를 통과한 후 얻은 기회였다. 지금 채용되는 직원들의 경우는 최대 4번의 인터뷰와 2편의 작문 테스트를 거친다.
그전 회사에서도 나의 매니저였지만 전에는 이 정도의 팀워크를 느끼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새 회사에서는 그야말로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그런 사이가 되었다. 아침에 출근하면서 xx님, 진짜 너무하지 않아요? 그거 어떡하죠?라고 목적어가 생략된, 혹은 있으나마나 한 문장을 말해도 우리는 서로 무슨 말을 하는지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었고 의견을 주고받을 수 있었다.
몇 년이 지나 나에게도 후배 한 명이 생겼다. 그녀는 우리 회사 업무를 하던 대행사에서 이미 일하고 있었기에 그녀가 얼마나 능력자인지, 좋은 사람인지 익히 알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 세 명은 한 팀으로 똘똘 뭉쳐, 지금 생각해 보면 어떻게 세 명이서 할 수 있었나 하는 엄청난 프로젝트들을 척척 해냈다. 서로가 서로의 장점과 단점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으며, 내가 부족한 점을 다른 사람이 보충해 주어도 아무런 불만 없이 감사히 도움을 주고받았다. 서로 상대방이 순수하게 선의로 도와주려 한다는 것을 완벽하게 믿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때의 나는 어느 정도로 회사와 팀에 대해 불만이 없었냐면 월요병이 없을 정도였다.
시간이 흘러 나는 싱가포르에서 매니저가 되고 그 후배를 싱가포르에 내 팀원으로 모셔왔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나의 싱가포르 회사 생활은 훨씬 더 힘들고 짧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꾸린 팀이 한국에서처럼 ‘이보다 좋을 수 없는' 팀이었나 생각해 보면 그렇지 않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매니저였던 내가 책임을 피할 수 없다.
‘이보다 좋을 수 없었던' 우리 한국 팀을 생각하면 아련하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하며, 싱가포르 나의 팀에게 미안하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