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순

by 강여자

목련



슬픈 사람이 웃는다

마알가니 파르르


입은 웃는데

눈이 운다니


시간은 멍울져도

모두에게 공평한 것


누구보다 먼저 활짝 웃었다가

이내 툭 모가지를 떨구고 만다


남은 계절, 있는지도 모르겠더니

그새 또 봄이라고 망울을 맺는구나


슬픈 사람이

불행한 건 또 아닌 것처럼


입이 먼저 웃고

눈이 뒤따라 입꼬리를

들어 올린다







"샘, 눈은 우는데 입은 웃는 사람이 엄청 슬퍼 보이거든요."



그의 말을 듣고 뜨끔했다. 내가 타인의 짐작 바깥에 있다고 생각해왔다. 사람들은 대체로 타인에 무심하다고도. 각자 보여주는 모습에만 관심을 보여도 충실한 관계가 될 거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대체로 이해받고 싶어하니까.



나이가 들며 다른 생각이 들었다. 생각보다 진실은 쉽게 드러난다. '저 사람은 남들이 바보인줄 아나봐.' 라고 말하고 나서 깨닫는 게 있었다. 나 역시 눈 가리고 아웅해 온 것을 아는 이가 있을 것이다. 그랬다. 나는 눈으론 울고 입으론 웃는, 모순적인 사람이다. 하지만 변명거리는 있다. 연기를 하려던 게 아니라 노력이었기 때문이다.



마흔이 되던 해 여름, 딸 아이가 장애 진단을 받았다. 세 돌이었다. 그때 나는 슬펐을까. 확신하기엔 자폐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둘째를 가졌을 때다. 그 아이가 자라 제 누나의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주지 않을까 상상할 즈음 꿈을 꾸었다. 화환이 가득한 방에서 날개를 달고 날아가는 하얀 아이가 있었다. 꿈이 이렇게 잘 맞는 것이었나. 검사를 끝없이 한 끝에 임신을 중단했다. 장애를 가진 아이 둘을 키울 자신이 없었다.



'행복해서 웃는 게 아니라 웃어서 행복한 것이다' 라는 말을 믿는다. 행복할 자격은 없지만, 그래도 행복해져야 했다. 감각적으로 예민한 아이를 키우는 사람이 언제까지 울고 있을 수는 없었다. 아이는 엄마의 표정을 보며 안전을 인지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아이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웃어주려 애썼다.



나희덕 시인의《그러나 꽃보다도 적게 산 나여》를 읽었다. 시인의 말은 '슬픔이 많은 사람이 반드시 슬픈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로 시작된다. 이 문장을 나는 슬픈 사람이 반드시 불행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입으로 웃다보니 간사하게도 눈이 따라 웃는 시절이었다. 여전히 스스로 용서하지 못한, 슬픈 사람이지만 불행하지 않았다.



웃으면서 울고 슬프면서 행복한, 모순을 견디며 살아가는 중이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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