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운전을
어떻게 했길래 그래
이런 말—
그래, 들어본 적 있다
살면서 들은 섧은 말들은
어찌어찌 다 잊었지만
묻었지만
엄마 나이 십 년
엄마 되어 들은 말은
어째 잊히지가 않아
유난 떤다고 살균제를 썼다니,
건강하게 낳아주신 부모님께 감사하라니
어째 잊히지가 않아—
단 한 마디도
남의 아이 섧게 할 말 하지 않기를
오늘도
그거 하나는,
그거 하나만
바라고
바라는
두 손
시아버지께서 돌아가셨을 때다. 아버지는 사고로 다리를 다치셔서 오래 앓으셨다. 처음 뵀을 때부터 편찮았기에 건강할 때의 모습을 알지 못했고 몇 차례 수술을 거치며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셨다. 장례식장에서는 더는 아프지 않은 곳에서 편히 쉬시라고 인사할 수밖에 없었다.
노인 인구가 많은 지역이라 장례식장에는 팔십 대 두 분의 장례가 더 있었다. 그래서인지 울음소리가 들리기는 했지만 대체로 조용히 추모하는 분위기가 이어졌다. 향을 꺼뜨리면 안 되는 장례식장에서 이틀간 분향소를 지키니 향 때문인지 피로 때문인지 얼마간 몽롱해 있는데 어디선가 절절한 절규가 들렸다.
젊은 여자의 곡소리. 멍한 정신에 일순간 찬물을 끼얹는 피 맺힌 오열이다. 둘째 아이 예정일에 차를 세워놓고 이렇게 울었었다. 내가 울다 울다 토하던 그 울음이다. 무심코 바라본 안내 화면에 아홉 살 아이의 사진이 있다. 목울대가 막히는 거 같다. 궁금해하지 않는 것이 사람의 도리라 여겨 애써 눈물을 삼켰다.
다음날 옆방 사연이 사람들 사이에 돌았다. 아이 엄마가 운전한 차가 사고가 나서 운전자와 아이 한 명은 다치고 안전띠를 하지 않은 아이가 사망했다고 한다. 큰 방 하나를 두 개로 나눈 탓에 옆방 소리가 여과 없이 들리는데 우리 방에서 일하는 아주머니가 연이어 두 번 큰 소리로 말했다.
“엄마가 운전을 어떻게 했길래 그래?
엄마가 운전을 어떻게 했길래 그래?”
순간 소름이 끼쳤다. 일면식도 없는 이가 대체 뭘 안다고 그런 말을 하는가. 그 가혹한 말이 부디 그이에게 안 들리기만 바랐다. 그런 말을 해도 된다면 사람이 사람일 이유가 뭘까 아득해졌지만, 이야기가 길어지면 더 좋지 않을 것 같아 차마 대꾸하지 못했다. 똑같이 입 다물었던 어느 날이 생각났다.
살면서 직접 들은 말 중에 가장 폭력적인 말은 ‘나는 내 새끼 그래 안 키웠다. 유난 떤다고 가습기 살균제 쓴 아들 어떻게 됐노?’라는 말이었다.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한 이들은 아이를 죽인 부모가 되는 건가. 잠깐 합석했던 자리에서 그 말을 듣고 나는 소름이 돋는데 일행 중 누구도 문제 삼지 않았다. 으레 할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장례식장에서의 나처럼 긴 이야기가 되지 않길 바랐을까.
『이 지랄맞음이 쌓여 축제가 되겠지』에 이런 부분이 있다.
오래전 지인을 따라 방문한 어느 교회에서 목사는 나의 장애를 거론하며 말했다. “하나님이 왜 장애인을 이 땅에 만드셨는지 아시나요? 그건 여러분께 현실이 얼마나 행복한지! 깨닫게 해드리려는 주님의 안배입니다. 저들을 바라보며 건강한 육신이 얼마나 축복인지를 아시길 바랍니다.” 강단 아래 100여 명의 신도들은 모두 “아멘” 하고 대답했다. 얼굴이 붉게 상기된 것은 나뿐이었다. 나는 그날의 치욕을 잊지 못한다. 어느새 들이친 죄책감이 발목까지 고여들었다. 입 속 남은 씁쓸함은 커피 탓이라 생각하고 싶었다. (187쪽)
나도 같은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아이가 유치원에 다닐 때 장애인의 날 공문을 받았다. 장애 인식 교육을 위한 공문이었다. 같은 반의 장애인 친구들을 보며 건강하게 낳아주신 부모님께 감사하라는 내용이었다. 흔히들 더 부족한 사람을 생각하며 자신의 처지를 위안하라고 하지만, 반대로 우리 아이는 건강하게 낳아주지 못한 부모인 내게 어떤 마음을 품어야 하는 것일까.
안타까운 마음에 했을 이야기들을 내가 예민한 눈으로 봤을 수도 있다. 하지만 듣는 이의 입장이 되어 본다. 당사자가 되었을 때 나는 분노하기도 했지만 그 이상으로 처절하고 슬펐다. 나쁜 의도가 없었다거나 생각이 짧았다고 하기엔 남길 상처가 너무 크지 않을까.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지독한 언어폭력.
말 한마디를 어떻게 해야 할지 두 손을 모아 질문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