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잎 오이 고추
감자전에 열무김치
덤으로 복숭아 한 알 더해
봉다리 봉다리
싸매 온
엄마 보따리
고이 개킨 빨래 옆에
파아란 메밀 베개
이게 무슨 벌레야, 깜짝 놀랐던
그 베개 하나를 돌돌 말아
우스운 바느질을 한다
이불실은 굵고 실해야 오래간다며
어느 날에 쌀 포대 뜯으시며 고이 감아둔
누에고치 한 고치
나비 되어 날아왔나
고비 고비
그냥 넘은 고개, 하나 없어도
내 팔자가 왜 이런가 한탄할 수 없는 것은
누락을 말하기엔
받은 사랑이
빈 곳 하나 없이
꼼꼼히도 싸인 까닭이다
나는 베개 유목민이다. 베개 유목민이란 꼭 맞는 베개를 찾기 위해 여러 제품을 바꿔가며 써 보는 사람을 뜻하는 신조어다. 말만 들었지, 내가 그렇게 될 줄은 몰랐다.
몇 해 전 교통사고가 있었다. 신호를 기다리던 내 차를 뒤차가 들이받아 목 통증이 심했다. MRI를 찍어 보니, 경추 다섯 마디에 디스크가 진행 중이었다. 퇴행성이라 좋아지긴 어렵지만, 치료를 받으면 진행을 늦출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땐 시간 여유가 없었다. 그러다 올봄, 아침에 일어났는데 어깨가 들리지 않았다. 병원에서는 당장 시술하자고 했지만, 고심 끝에 자세 교정부터 해보기로 했다.
먼저 베개를 바꿔 봤다. 옆으로 자는 사람에겐 높이가 있는 베개가, 똑바로 자는 사람에겐 낮은 베개가 좋다고 했다. 나는 똑바로 잠들어 옆으로 깨는 편이다. 한 가지 자세로 오래 자지 못하니, 어떤 베개도 금세 불편해졌다. 그런 사람을 위한 사분할 베개도 있었다. 옆으로 잘 때는 귀 옆이 높고, 정자세일 땐 목을 받치는 부분이 낮으며, 머리를 받치는 곳은 다시 조금 높게 설계된 구조였다. 말만 들으면 그럴듯했지만, 사람마다 체형도 다르고 자는 습관도 달라 써 보기 전엔 알 수 없었다. 결국 몸에 맞는 베개를 직접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
마침 엄마가 파란 메밀 베개를 주셨다. 낮은 메밀 베개 하나를 동그랗게 말아 옆으로 누웠을 때 적당한 높이를 만들고, 다른 하나는 뒤에 평평하게 이어 바로 누웠을 때 머리를 받치게 하면 될 것 같았다. 야심차게 반짇고리에서 실과 바늘을 찾는데 낯선 털 뭉치 하나가 덩그러니 있었다. 손가락 마디만 한 크기의 하얗고 보드라운 그것은 누에고치 같았다. 속이 비어, 폭폭 눌리는 감촉이 좋았다. 이게 뭐지, 당황한 찰나, 뇌리를 스치는 기억이 있다.
어릴 적, 엄마는 자주 이불 홑청을 빨았다. 풀을 먹여 잘 다린 홑청을 요에 꿰매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좋았다. 새로 꿰맨 하얀 이불에 폭 싸이면 고치 같았을까. 이불을 꿰맬 때는 특별히 튼튼한 실을 쓴다. 나무젓가락에 감아둔 고운 미색 실. 그것의 정체를 몰랐는데, 어느 날 엄마가 쌀독 앞에서 분주히 뭘 감고 계셨다. 쌀 포대를 봉합하는 실이 굵고 실해서 잘 잘라 나무젓가락에 감아두신다고 했다. 다시 보니 딱 그 실뭉치였다. ‘이건 또 언제 가져다 두셨지?’ 피식 웃음이 났다.
그 주 내내 ‘내게 누락된 것’이라는 시 숙제에 골몰하고 있었다. 누락. ‘마땅히 기록되어야 할 것이 기록에서 빠짐’이라는 사전적 정의를 붙들고 긴긴 상념에 잠겼다. 시상을 붙잡으려면 다시, 오랜 시간을 들여 빠져나온 터널 속으로 들어가야 했다. 터널 입구에 멈춰 반짇고리 속 실을 바라보는데, 감정처럼 문장 하나가 불쑥 떠올랐다. “누락을 말하기엔, 받은 사랑이 너무 많다.”
누구나 그렇듯, 내 삶에도 사고가 많았다. 사는 게 원래 이렇게 힘든 건가 싶을 때마다, 아래로 아래로 가라앉는 감정을 붙잡아 주는 것이 있었다. 때로는 조용한 말로, 때로는 벼락같은 호통으로, 또 어떤 날은 말없이 행동으로 나를 붙드는 엄마다. 받은 사랑이 단단히 나를 감싸, 고치가 되었다.
나는 절대 잘못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