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 만난 우울증!

멜랑콜리아

by 토끼

우울증을 바라보는 새로운 단상,
멜랑콜리아

이영화는 우울을 소재로 지구종말을 다룬다.


때로 영화는 열광하면서 영화관을 나왔지만 카페에 앉아 흥분을 가라앉히고 피로연 같은 영화 뒤풀이를 하려고 보면 아무 할 이야기가 떠오르지 않는 영화가 있는가 하면
아무런 아야기도 없이 머릿속에서 맹도는 영화도 있고.
그저 조용히 좋네 라고 미소 짓게 하는 영화도 있고. 이해할 수 없는 실타래가 머릿속에서 엉겨있는 그런 영화도 있다. 멜랑 꼬리아가 딱 그런 영화이다.
라스 폰 트리에 영화가 원래 난해하고 불편한 영화지만 이영화는 좀 결이다른 형식을 띤,
착한 영화의 범주에 넣으면서. 어쩌면 웃는 얼굴로 침을 우아하게 뱉는 그런 느낌이었다. 실타래를 풀고 싶은 마음도 없이 잊힌 영화였다. 오필리아를 상징하는 포스터와 영화 속 등장하는 그림들과 상징적인 아름다운 영상들이 지구종 말이라는 스토리보다 머릿속에 잊히지 않았던 영화로 남았었다.


10년 주기로 읽었던 책을 다시 읽는 것처럼 한번 보았던 영화들을 다시 보는 것도 즐거움 중 하나인 요즘 멜랑콜리아 영화를 다시 보았다.
역시 탁월한 재탕이었다. 몇 년 전 잊힌 얽힌 실타래가 풀어헤쳐지는 카타르시스를 맛보는 기쁨!
인간이 가진 모든 우울이라는 감정의
근원지는 죽음의 두려움이라는 종착역에서 끝난.
우울이 죽음이라는 종착역에 가까워질 때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이영화는
우울이라는 멜랑꼴리가 주는 다양한 해석에서 해방감을 안겨주는 영화였다.
누구보다 보편타당한 삶을 잘 살고 있는 척하는 나에게. 처음 글을 쓰는 동기부여의 첫걸음마는 마음속 긍정과 부정이 아닌 다름이라는 메커니즘을 수용하려는 의지에서 시작되었다.
그 다름은 내가 알던 모든 관념들을 깨부수는 것들의 시작이었다.

우울은 내가 남들과 다른 데서 오는 소외에서부터 시작되는 자신만의 부정적인 감정과 생각들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들과 , 감정은 나약하고 부정적이라서 무시당하고 외면받는다. 그렇게 관계 속에서 설자리가 없어지고 스스로도 외면하게 되면 마지막 선택은
삶을 끝내는 것이다.
타인들로부터 이런 우울이 존중받고 이해되는 날이 오는 건 불가능해 보인다. 우리는 보편이라는 기준이 인간의 자유와 고유성을 얼마나 억압하고 탄압하는지 모른 채 평범이라는 기준 속에 살고 있다.
영화 속 주인공 저스틴은 결혼식날 이혼한 부모의 무관심과 개인주의 주변인들의 기대때문에 찾아온 우울증으로 인해 가장 행복해야 할 결혼식을 엉망으로 망쳐버린다. 보편적이지 않은 기이한 행동을 함으로써.... 관객조차도 이 행동이 불편하고 측은하고 안쓰럽고 , 자기 파괴적이며 , 나약하고, 이기적이고 비난받아 마땅한 것이라 몰아붙이지만, 보편타당한 것이
무엇의 기준에 의한 것인지 이 영화는 묻고 있다.
지극히 평범한 개인 간의 욕망들을 공유되는 상징 같은 결혼식에서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연출된 행복을 저스틴은 참아내기 힘들다.
사랑이라는 이름도
의미를 잃는다.
아무런 존재의 의미를 모른 체
호흡만 하고 있다.

영화는 1부에서는 결혼식 장면만을 다루고 있다.
2부에서는 우울증으로 힘든 저스틴이 언니의 대저택에 함께 살면서
멜랑콜리아라는 행성이 지구에 충돌하면서 영화는 끝난다.

자구 종말이 다가오자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언니 클레어에게 저스틴은 말한다.

"내 안의 우주가 사라졌는데 세상의 종말이 온들 무슨 상관일까?"

저스틴에게 삶은 죽음이고
죽음 이 곧 삶이다.

사람들은 각자 자기의 모습으로 살고 있다. 저마다 불행과 행복의 교차점에서 혼란스럽게 살아간다.

멜랑콜리아라는 거대한 행성이 지구를 향해 다가오고 종말을 예고하자
저스틴의 언니 클레어와 형부는 희망을 부여잡고 행성이 비켜가기를 기도하지만 행성이 지구로 다가오면서 두려움과 광기에 형부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언니 클레어는 패닉에 빠진다.
하지만 저스틴은 오히려 침착해진다.
종말이 느껴지자.
생명이라는 존재를 느끼게 된다.
우주와 자신이 하나라는 인식을
가지게 된다.

지구종말은 저스틴 자신의 우울증이 사람들로부터가 아닌 자신으로부터 위로를 받게 되고 죽음 자체를 이해하게 만든다. 담대하게 언니를 위로하면서 다독인다.
"두려워하지 마 그저 이치일
분이야."
종말을 맞이하는 순간 주인공을 말한다.
"지구는 사악해!"

인간들이 모두 사라진다고 해서 우주는 달라질 것이 없다.
모든 건 정해져 있는 법칙 같은 것이라고...


멜랑콜리아 행성의 출현은
주인공의 참을 수 없는 우울증이 스스로를 짓누르는 게 아니라 보편적 삷속의 짓눌린 자유의 몸부림을
인식하는 계기가 된다.
생명의 우울은 죽음을 껴안는 순간 치유된다.
지구라는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생명의 유한한 두려움을
망각하거나. 견디며 살아가고 있다.

원시 시대부터 내려온 공동체를 벗어나면 죽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은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보편타당한 이념을 만들지만 그 안에서의 폭력은
보편타당한 사고와 행동에 벗어난 사람을 정신적으로 이상하다고 매도해버린다. 하지만
멜랑콜리아 행성은 말한다.
세상에 정상적이라는 기준은 없다고
우리 모두는 언제나 절대적이다.
절대적 존재가 우주 속으로 흡수되는 건 우주와 하나가 된다.
내 안의 우주가 사라지는 이유는 누군가가 가 정해놓은 기준에 맞추면서 살아가야 하는 자유가 억압당할 때
우리는 피괴된다.

지구 종말이라는 소재를 아름답고 카타르시스적으로
지극히 사적으로 개인적인 감정으로
영화를 소비하고 나면.
영화 속 지구는 종말 하고.
엔딩이 올라가면
마음은 다시 소생한다.
우울이라는 아름다운 색채를 사랑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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