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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끼 Dec 04. 2020

믿음

받아들임

그림 장욱진

마음의 안전장치가 삐끗한 이후부터 오랜 시간 명상을 해왔다.
마음의 평온은 나의 자아를 변형시키는 일이었다.
생각을 비우고 버리고 내 안의 참나에게 나를 내맡기는 일이었다.
명상을 하는 동안의 평온한 느낌을 일상 속에 가져오려면 사물을 보는 눈과
상황을 대처하는 자세가 변해야 했다. 늘 살아오던 습관대로 관념대로 무의식에게 나를 맡기는 것이 아니라 나를 객관화시켜서 바라보는 것이다.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다.
마음공부라는 게 속성으로 어디 되는 게 있던가!


부서지기를 반복해야 겨우 온전한 하나를 건지게 된다.
부서지고 깨어지면서 얻은 결론은 지금 여기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이 두 가지였다.
  하지만  지금 여기를 살아가려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데 어디 그리 쉬운 일 인가!
돈오의 꽃 이란 시에서 도종환은 이렇게 얘기한다.

깨달음을 얻은 뒤에도
비 오고 바람 분다
연꽃 들고 미소 짓지 말아라
연꽃 든 손 너머

허공을 보지 못하면
아직 무명이다
버리고 죽어서
허공 된 뒤에

큰 허공과 만나야
비로소 우주이다
백 번 천 번 다시 죽어라
깨달음을 얻은 뒤에도

매일 별똥이 지고
어둠 몰려올 것이다

 불교 경전을 읽고 성경을 읽고 철학책을 읽고 잠깐의 깨달음은 얻지만 도종환의
짧은 시처럼
 어둠이 밀려와 언제나 제자리걸음이었다. 힘든 일을 당하면  어김없이 나를 덮치는
불안과 두려움이라는 허상뿐인 자아에게 내 전부를 내어주어야 했다.
두려움과 평온함을 분별하는 나로 인해 괴로움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온전한 받아들임이 안되면 내가 갈길은 무엇인가!
나를 버리든지 나를 변형시켜야 한다.
 그 무엇도 안된다면 그저 고통받으면서  되는대로 살 수밖에 없다.

마음이  절벽 앞에 서면 두려움과 동시에 신을 찾는다. 원망도 하고 절망도 하고 삿대질도 하고 질문도 한다.
모든 불행을 신에게 뒤집어 씌우기도 한다.
그리고는 포기한다.  나는 할 만큼 했다.
내 운은 여기까지 인가 보다.
눈물도 마르고 소리 지를 힘도 없어 그저
신의 뜻대로 하라고 체념할 때
신은 손잡아 준다.
혼자가 아님을 알게 해 준다.
내가 사랑받고 있고
사랑을  베풀 수 있는 존재임을
깨닫게 해 준다.

  신을 사랑함에 있어
보험이나 보상 같은  영생 따위는
알고 싶지 않다.
죽음 이후의  천국에도 관심이 없다.
구원 따위에도   관심이 없다.
오직 지금의 평온. 현실에서의 행복을 원할 뿐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당신은 그리스도교를 한참 잘못 알고 있오!
그러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랑 말고 중한 것이 무엇이요?

그래서 신을 믿는가!
믿는다.
그분의 사랑의 힘을 믿는다.
그분을 믿었더니 내가 변형되는 걸 느끼게 되었다.
  그분의 사랑이 내 마음에 들어와서 일어난 일은
그렇게도 힘들었던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식은 죽 먹기처럼 쉬워졌기 때문이다.
내 안의 고통도 아무런 저항 없이 다 받아들여지고
타인의 고통과 절망. 미움 증오까지 내 안에서 다 받아들여지는 게 아닌가.
나의 자아는  그 어떤 이유나 변명도 없이 변형되고
 사라지고 없어지기를 반복했다.
단지 그분이 내 안에서 다 하는 일이었다.
그럼 죄로부터 회개는 했는가?
그건 잘 모르겠다. 아직 죄에 대한 정의가 서질 않았다.
그건 차차 내자 아가 변화되면서 받아들일 것이다.
지금은 단지 마음에 관한 얘기를 하는 것뿐이다.

너의 주인은 누구인가?
이 당연한 물음에 지금은  
나를 배제시킨다.
나의 주인은 이제 내가 아니다.
네가 될 수도 있고
우주가 될 수도 있고
작은 풀잎이 될 수도 있다.
신은 나를 사랑이라는 이름 안으로
변형시킨다.
욱 체가 얻는 모든 질병은  유전자의 자연현상이며 필연적 운명이다.
하지만 마음이 얻는 모든 병은 받아들임의 저항에서 오는 충돌이다.
저항이 없는 마음은 그저 흘러갈 뿐이기 때문에 평온하다.
마음의 저항이 없으려면 있는 그대로가 받아들여져야 한다.
판단하지도 분별하지도 말아야 한다.
불교의 가르침과 가톨릭, 기독교, 이슬람교의 근본적인 가르침은 바로
분별없는 받아들임이다.
단지 그 주체만 다를 뿐이다.

어떤 주체를 받아들여서 내 자아가 더 쉽게 변형되는지는 자신의 영적인 선택이다.
누구의 주체가 맞고 틀린 문제가 아니다.
그 주체가 없이 참나의 존재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참나라는 신성도
바로 신이라는 주체이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주어지는 영적인 보호 아래 살아간다.
이러한 신성을 느낀다면 자아는 존재론적 기쁨을 느끼면서
살아갈 수 있다.
외부에서 오는 이유 있는 행복이 아니라
내 안에서 차고 넘치는  조건 없는  행복 때문에
실없는 웃음을 흘리면서
살아갈 수 있다.
온 저한 받아들임은 바보 같은 삶이 아니라
바로 이런 존재론적 삶의 기쁨을 경험하는 최고의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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