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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끼 Nov 26. 2020

눈물과 차 한잔

슬픔

눈물아 차 한잔 하자.

매일 오가는 골목길 아침 출근길에 20대 젊은 여자가 쪼그리고 앉아 서럽게 운다.
핸드폰을 꼭 잡은 손은  심하게 떨리고 벽을 잡고 울다가 자리에 주저앉아 운다.
문득 그녀 옆에서 같이 울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터지는 눈물은 슬픔의 한계치를 넘어 버린 눈물이다.
세상에는 나와 내 슬픔 둘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고통의 둑이 무너지고 범람한 눈물은 이제 넘치지 않고서는 덜어낼 방도가 없다.
실연당한 걸까?
시한부 인생일까?
누군가의 상실일까?
분노와 억울함인가?

그 어떤 이유이든 몸은  그녀를 지나쳤지만  마음은 이미 그녀 곁에 가서 어깨에 손을 얹고 있었다. 그녀의 슬픔과 아랑곳없이 나는 그녀의 눈물이 부럽다.
나는 눈물이 잘 흐르지 않는다.
울고 싶을 때, 울어야 할 때 , 눈물이 나지 않는다는 것만큼 슬픈 일은 없다.
내 마음의 병은 조금이라도 불편한 상황이 되면 모든 감정을 두려움으로 인식해 버리는 감정의 오류이다. 엄마의 죽음 앞에도  슬픔이라는 감정이 아닌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먼저 덮쳤었다.  슬픔은 아주 건강한 마음의 흐름이다. 눈물은 슬픔을 조절해주는  안전장치 같은 것이다.  고통이 복 받힐 때 눈물이 있어서 우리는 그 고통을 조금이나마 덜어낼 수 있다.
하지만 눈물이 없는 감정은 여기저기에서 빠져나갈 통로가 없어서 막히고 만다.


언제부턴가 강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스스로를 채찍질한 그때부터 눈물이 말라 버렸다.  눈물 흘리는 사람은 의지가 약한 사람이라는 인식이 싫어서 감정을
꾹꾹 눌러서 구겨서 숨기는 습관이 몸에 베이자,
눈물도 줄어들고 말라버렸다.


 아이들은  무조건 운다 무서워도 울고 슬퍼도 울고 아파도 울고 배고파도 울고
화가 나도 운다.  눈물샘은 감정의 정화시스템 같은 것이다.
눈물이 흐를 때 엔도르핀이 함께 나온다고 하지 않는가!

우리의 마음을 치유하는 감정중에는
기쁨보다도 슬픔으로 치유되는 감정들이 많다.
슬픔의 애도만 충분히 해도 마음은 치유된다.
눈물은  감추어야 할게 아니라 드러내어 흘러내리게 해야 한다.

나이가 들면서 이제야 슬픔을 공부하고 슬픔을 배운다.
눈물을 흘리려고 감정을 느슨하게 풀어보기도 한다.

슈베르트는 슬픔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나의 작품은 음악에 대한 나의 이해와 슬픔을 표현한 것이다.
슬픔으로 만들어지는 작품이야말로 세상을 진정 행복하게 하리라고 생각한다. 슬픔은 이해를 돕고 정신을 강하게 한다.
슈베르트는 슬픔의 힘으로 작품을 만들었다.

짧은 생에  동안 음악으로 슬픔을 써 내려간 슈베르트의 음악은
어린 시절 눈물이 주는 카타르시스와 순수함을 다시 소환하고
내 잃어버린 감정의 시간여행을 찾는 시간을 준다.


눈물이 이렇게 이야기한다.
슬픔이 밀려오면 언제 어느 때 그곳이 어디든
주저앉아 울 수 있는 내가 더 강한 사람이다.
슬픔을 표현하는 내가 더 강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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