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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끼 Jan 24. 2021

세상에서 가장 웃고픈 기억

그녀


픔을 견디어 내는 힘은
어쩌면 아주 희극적인 어떤 한 장면을
기억에서 꺼내어 웃어보는 일이다.


한때 어머니를 이 세상에서 떠나보낸 상실의 아픔을 아마도 난  이 기억에 기대어 슬픔보다는
웃음으로 버틸 수 있었는지 모른다.


지금도 그 표정을 생각하면 웃음이 터지고
사랑스럽고
때로는 따뜻한 슬픔이 차오른다.



엄마는 근엄했다. 무섭고 언제나 대쪽 같았다.

7남매를 키우느라 정신없던 엄마는
마흔이 훌쩍 넘어 나를 낳았다.
온 식구가 날 오냐오냐 한다며 버릇이 나빠진다고  늘 나에게 메몰차고 엄격했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흰머리가 나고 벌써 등이 굽어버렸다.
언니들은 할머니가 다 된 엄마와 늘 팔짱을 끼고 다정하게 다녔지만
나는 엄마가 언제나 무섭고 싫었다.

또래의 친구들의 젊은 엄마가 부러웠다.



하지만 그런 엄마가
어린 나에게  만만하게 돼 버린 사건이 그해 겨울이 일어났다.
그날 이후 엄마는 나에게 종이호랑이가 되었다.
아무리 무섭게 날 야단쳐도 그 표정만 생각하면
속에서 웃음보가 터지니.... 그날  엄마가 날 그곳에 데려간  일생일대의 실수였다.


그날은
엄마의 자랑이던  둘째 언니가 감기몸살로 꼼짝도 못 하고
회사에 갈 수가 없던 날이었다.
마침 집에는 나와 엄마 단 둘 뿐이었다.


회사로 전화를 해야 하는데
 전화기가 귀했던 그 시절.

친구 영자네 집에 놀러갔다가 전화를 걸어본걸
내내 자랑했던  내 손을 잡고

엄마는 동네에 하나밖에 없는 공중전화기 앞으로 갔다.
무슨 영문인지 나에게 전화를 하라고 호령했다.


엄마는 그때까지 전화라는 걸 한 번도
걸어 본 적이 없는 게 분명했다.


 다이얼을 돌리고 신호음이 울리더니
전화기 속 음성이 들렸다.
 기계속에서  사람 목소리를 듣자 심장이 콩당콩당 뛰었다. 

담당 과장의 목소리가
나오자 정신이 아득해져서 엄마에게  언른 전화기를 건넸다.
언제나 나에게 완고한 표정의 엄마는
 일순간 갑자기
내가 모르는 황당한 모습의
 사람으로 돌변했다.
아니 이상한 여자 돼 버렸다.
그 비굴한 모습은  짠하다 못해 희극적 이었다.



여자는 두 손을 가지런히 비비면서  전화기를 황송하게 떠받들듯이 잡았다.
그 모습이 마치
Tv를 보면 장원급제한 신하가 임금으로부터 패를 받는 모습과 흡사했다.


 허리를 굽신거리며 고개를 조아리며 말문을 열었다.
"딸이 아파서 오늘은 회사를 갈 수가 없습니다."
그 한마디를 하는 엄마의 얼굴은
" 전하 황공하옵게도 소녀의 딸이  고뿔에 걸려 전하를 뵈올 수가 없습니다. 귀하신 회사의 유능한 재원을 건강관리를 잘못한  어미의 잘못이  크오니  소녀의 불찰을 꾸짖어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
딱 그 표정이었다.  거기에다
전화기에 대고 고개를 조아리며 계속 절을 해대는 게 아닌가!


저 여자는 내가 아는 엄마가 아니다.
저 비굴하고 황송한 얼굴의  엄마는 생전 처음 보는 여자였다.
 하지만 더 경악을 금 할 수 없었던 건
전화를  끊고 나서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신이 어떤 표정으로 전화를 걸었는지 모른다는 얼굴로  나를 향해 짖던 그 도도한 표정의 완벽한 변신이었다.


하지만 난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내 유년의 기억 속 엄마와의 한판승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날 11살의 소녀는

근엄한 엄마의 뒤태를 보며

 걸었다.

그리고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엄마 엄마는 오늘  나한테 다 들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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