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닝

무의미의 바다

by 토끼

삶에서 평생 마주치게 되는 것들은 모두 사건 사고 그리고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이다.

눈앞에 닥친 문제는 해결하는 것만이 답은 아니다.

해결보다 중요한 건
해석이다.

어떤 시선으로 그 문제를 바라보느냐에 따라
모든 건 그
해석이 달라진다.
해석에 따라서 해결할 필요가 없는 그런 것들도
생겨난다.

어제는 맞고 오늘은 틀리는 그 해석들은
늘 언제나 변하는 마음 때문이다.


여기 세 사람의 인물이 있다.
영화 속 인물들은 모두 복잡한 메타포를
가지고 있다.
영화가 끝난 뒤에도 새로운 해석이 필요한
인물이 튀어나와 계속 일상에서 말을 건다.

나는 밴이다. 두 시간 남짓한 영화 속에서
내 비중은 그다지 크지 않다.
사실 난 이영화의 주인공도 아니다.
종수라는 주인공이 던지는 많은 질문들에
난 그저 수수께끼 같은 존재의 인물이다.

이 무의미의 바다 같은 세상에서 인간은 기댈 수 있는 많은 것들을
찾는다. 사랑. 가족. 돈. 명예. 권력. 종교. 믿음.
내가 기댈 수 있는 것은 즐거움이다.
나는 즐거움 뒤에 오는 허무조차도 즐긴다.
하지만 종수의 팍팍한 삶은 그런 날 분노와 의심의 시선으로 본다.

난 왜 내가 살해당해야 했는지
도무지 납득이 안된다.
사람들은 나의 즐거움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에게는 의미를 찾는 일이
즐거움보다 먼저이다.

나의 죽음과 함께 사라진건
무의미였을까?

그것은 단지 상상 속 설정이었는지
진짜 죽은 건지도 확실치가 않다.
그런 건 이 영화에서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존재와 비존재 사이의 인물이 나일까?

죽을 만큼
내가 잘못한 게 있다면
삶을 즐긴 것뿐이다.

내가 가진 걸 누리면서 타인들과 대화하고
뼛속 깊이 베이스를 느끼면서 살아있음을 느끼는 그런 삶이었다.
단지 나의 결핍이라면 가진 것이 너무 많아서 감정이라는 것에
둔감하고, 냉소와 무관심으로 사람들을 대한다는 것이다.
내가 단지 이런 이유로 죽어야만 했을까?

난 해미가 어디로 갔는지 알지도 못한다.
하지만 관객들은 내가 해미를 죽였다고
확신하는 이들도 있다.
해미는 그저 사라졌을 뿐이다.

나 또한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이창동 영화에서 주인공들은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영화 버닝에서 나 벤은 꽤 매력적인 인물이다.
감독은 이번만큼은 매력적인 인물이 필요했을 것이다.

방황하는 청춘 이야기에 나 같은 금수저 하나쯤은 필요했을 테니까.
내가 매력적이지 않다고?
반문하는 사람들이 았다면
그런 시선으로 날 봤다면 당신은 종수처럼 열등감 넘치는 결핍을 가진 사람이다.


난 평생을 일하지 않고 놀고먹으며 흥청대며 사치를 부려도 될 만큼 돈이 많다.
그래서 난 아등바등 거리며 살 필요 없이 삶을 즐기기로 했다.

아프리카 여행을 하던 중 나이로비 공항에서 아주 재미있는 여자 하나를 만났다.

바로 해미라는 가진 것이라고는 몸뚱이 하나밖에 없지만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여자였다. 여자는 전재산을 털어 아프리카 여행을 왔다.
아프리카 여행을 택한 이유는
딱 하나였다.
부시맨을 만나기 위해서....

"아프리카에는요 부시맨이 살아요. 그들은 배가 굶주린 자와 영혼이 굶주린 자
둘로 나뉘는데. 리틀 헝거와 그래이트 헝거라고 해요.
전 그레이트 헝거를 만나러 아프리카 여행을 왔어요. 그들은 아침부터 시작해서
어둠이 내리는 밤까지 춤을 추어요. 처음에는 아주 작은 몸짓으로 추던 춤이 밤이
되면 그레이트 헝거처럼 춤이 변해요. 그렇게 그들은 그레이트 헝거가 되어 소멸하는 거예요.
전요 죽는다는 건 너무 두렵지만. 가끔은 죽고 싶어 져요.
처음부터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처럼.
그렇게 사라지고 싶어요"

해미는 특이하고 재미있는 여자였다. 팬터마임을 배우면서, 배우를 꿈꾸지만, 재능은 없고, 친구도 없고, 행사 도우미를 하면서 카드빛에 시달리며 가족마저도 등을 돌려버린 외로운 여자이다.

그녀는 귤을 손에 놓고 마임을 한다.

귤을 까서 맛있게 먹는다.

"어떻게 그렇게 실감 나게 연기할 수 있어?"라고 종수가 신기해 하며 묻자.

"그건 아주 간단해!
여기 귤이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여기에 귤이 없다는 걸 잊어먹으면 돼, 그게 다야

중요한 건 진짜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러면, 입에 침이 나오고 진짜 맛있어”

해미는
신용불량자가 되어도 해야 하는 것보다
하고 싶은걸 먼저 하는 순간순간을 즐기는 그런 여자였다.
해미는 그렇게 순간을 즐기다.
사라지고 싶어 했다.

이 권테로운 일상에서
해미는 잔잔한 즐거움이었다.

내 취미는 좀 독특한 사람들과 사귀면서 즐기는 것이다. 리틀 헝거같이 배고픈 영혼이지만
그래이트 헝거를 꿈꾸는 그런 여자들은 내가 휴혹하면 쉽게 넘어온다.

난 그런 여자들의 허영을 채워주고
그 여자들의 열정은 나의 권태를 채워준다.


왜냐하면 자신이 특별하다고 자부하기 때문에 나 같은 매력적인 남자의 선택은
존재가치의 증명과도 같은 것이다. 그녀들은 그래서 돈에 더 취약할 수도 있다.

세련된 매너와 잘생긴 얼굴 풍요로운 돈 지적인
나를 거절할 여자는 없다. 리틀 헝거들은 내가 비추는 빛을 향해
오징어처럼 달려오게 되어 있다. 나에게
해미도 그런 여자들 중 한 명이었다.
우리가 한국에 도착했을 때 공항으로 해미를 마중 나온 남자는 종수라는 해미의 동창이었다.

해미는 남사친이라고 나에게 종수를 소개했다.
내가 대학생일 때 그들은 이제 막 초등학교를 졸업했을 것이다.
해미가 나를 소개할 때 종수의 그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실망과 낙심 의심에 가득 찬 그 표정을 향해 난 해맑게 웃었다.

종수는 해미의 초등학교 동창이었고 아프리카 여행 전 둘은 성인이 되어 우연히 거리에서 재회한다. 엄마의 손을 잡은 어린아이에게 엄마는 얘기한다.
"너 공부 안 하면 저런 일 하면서 살아야 되는 거야."
등산용 옷들을 짊어지고 배달하는 종수는 딱 그런
모습이었다.

해미와 종수는 몇 번 만나서 술을 마시고 한 번의 섹스를 한 뒤 해미는 바로 아프리카로 여행을 떠났다.
나는 해미만큼 종수라는 친구에게도 흥미가 생겼다.
사람을 경계하는 그 눈빛이 고양이를 닮았다.
해미를 사랑하면서도 내가 해미와 밀회를 즐기는 것을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함께 만난다.
종수는 분노조절 장애를 가진 아버지 때문에
어머니가 일찍 가출하고
누나마져 일찍 시집가 버리자 혼자가 되었다.
대학에서 문예창작과를 전공했지만.
작가는커녕 변변한 직업도 없이 알바를 찿아다닌다.
소설을 쓰고 싶다는 꿈만 있을 뿐 단 한 줄의
글도 쓰지 못한다.

해미가 아프리카 여행에서 찾아 헤맨 건 무엇이었을까? 그레이트 헝거를 찾아 삶의 의미를 찾고자 했지만. 내가 손을 뻗치자.
너무 쉽게 내가 쳐놓은 달콤한 그물 안으로 찾아들었고,
빠져나가지 못하는 물고기가 되었다.


나는 해미와 종수라는 평범함 삶을 뒤흔드는 악마 같은 달콤함이면서
질문이고 수수께끼 같은 혼돈 그 자체였다.

우리는 자주 셋이서 같이 만났다..
처음 집으로 둘을 초대했을 때,
그들이 베란다에서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종수가 해미에게 말했다.
"어떻게 하면 젊은 나이에 저렇게 살 수 있지?

해미 넌 저 사람이 널 왜 만난다고 생각해?"
해미는 무심하게 대답한다.
"아 오빠가 내가 좋데... 나 같은 사람이 흥미 있데...."


이 미묘한 관계 안에서 종수는 그저 수동적으로
나와 해미를 지켜보았다.

종수는 날 바라보는 시선에는 무력감 내지 의심과 분노 증오가 섞인 모호한
감정들이 섞여 있었다.


종수는 해미를 사랑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내 눈에 비친 둘의 관계는 모호했다.

"내가 아프리카 여행을 떠난 뒤 우리 집 고양이
밥 좀 챙겨 줄래?"
해미를 세 번째 만난 날. 종수는 해미의 집으로 간다.
"종수야 어렸을 때 네가 나한테 했던 첫마디가 뭔 줄 알아? 너 못생겼다 였어."


"난 그런 얘기 한 기억이 없는데""


"자 이제 진실을 얘기해 봐"


해미는 종수에게 키스한다. 정신도 못 차리는 종수에게 익숙하게 콘돔을 꺼내는 해미!
해미에게 섹스는 아무 의미 없는 것처럼 쉬웠다.

해미가 떠난 뒤 종수는 고양이 밥을 주러
햇빛이 들어오지 않는 해미의 작은 원룸에서 자위를 한다.
낯선 이 가 있으면 숨어버린다는 고양이는 처음부터 없었던 걸까?
불러도 나타니지 않는다.

알바를 전전하면서
하루 벌어먹고사는 종수는

그녀가 소중해서가 아니라.

더럽고 치사한 생업의 현실에 그나마 작은 볕 같은 해미라는 설렘마저 없으면
다시 어두운 골방 같은 시간이 두려워 애타고 서툴게 해미를 끌어안았을 것이다.

우리는 어느 날 저녁 파주에 있는 종수의 집에서 석양이 지는 저녁 하늘을 보면서
와인을 마셨다.
해미는 두 남자를 사이에 두고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어쩌면 지금이 인생에 있어 가장 행복한 시간인지 모른다며 행복해한다.

나도 저 노을처럼 사라지고 싶다..
죽는 건 너무 무섭고
그냥 아예 없었던 것처럼 사라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해미는 춤을 춘다.
노을 진 석양 위로 윗옷을 벗어던지고 아름다운
나체로 춤을 춘다.
리틀 헝거는 점점 그래이트 헝거가 된다.

별빛이 쏟아지자 떠날 채비를 하는 해미에게 종수는
머뭇거리며 말한다.

분노와 증오 무관심 어린 말투로

"너 왜 남자들 앞에서 그렇게 쉽게 옷을 벗어?
창녀처럼..."

해미의 얼굴이 굳어버린다.

그날 이후로 해미는 종수에게로부터 사라진다.
모두에게서부터 사라졌는지 모른다.

나에게 해미는 재미를 위한 놀이였고.
그 재미는 점점 또다시 권태로워졌었다.

종수는 나에게 계속 해미의 안부를 묻지만 나도 궁금하기는 마찬가지다.

그 사이에 나에게는 새로운 여자 친구가 생겼고 그녀의 반짝이는 눈을 보면서
잠시 또 권태를 잊는다.

해미의 행방을 찾아서
종수는 며칠째 나를 미행하고 있다.

오늘 우리 동네를 배회하고 있는 종수를 우연인척 아는 척한 뒤
집으로 데리고 왔다. 내 친구들과 함께 저녁시간을 보내자고 제안했지만.
종수는 오래 머물지 않았다.

"종수씨 왜 벌써 가려고...? 해미에 대해 뭐 할 말 있어서 날 찾아온 거 아냐?"
"아뇨 이제 됐어요 가볼게요"
나는 종수의 심장에 손을 얻었다.

"종수 씨는 너무 진지한 것 같아
진지하면 재미없어요
즐겨야지
여기서, 베이스를 느껴야 돼요
뼛속에서부터 그게 울려줘야 그게 살아있는 거지.”

종수는 이상한 눈으로 날 잠시 바라보고는 차를 타고 갔다.

해미의 이야기가 맴돈다.

리틀 헝거와 그레이트 헝거.
리틀 헝거는 그냥 배가 고픈 사람이고.
그레이트 헝거는 삶의 의미에 굶주린 사람이래.
우리가 왜 사는지, 우리 인생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런 걸 늘 알려고 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진짜 배가 고픈 사람 그레이트 헝거라고 부른데.....

우 리셋 중 누가 그레이트 헝거에 가까울까?


나는 의미 띠위 필요 없이 그저 즐거우면 됐다.
오늘 즐겁지 않으면 즐거울 거리를 찾으면 되는 거였다.

그래서 불법인걸 알면서도 대마초를 피우고 가끔씩 범법행위인 줄 알면서도
남의 비닐하우스를 태운다. 해미는 나의 부에 기대어 잠시 더 자유를 누리고 싶어 했고.
종수는 나라는 수수께끼를 동경하고 분노하고 열망하고 욕망하고 증오하고
가지고 싶어 했다.

소설을 쓰겠다던 종수는 세상이 수수께끼 같아서 아무것도 쓸 수없다고 말했다.
종수에게 소설은 어떤 것일까? 세상에게 자신을 내보이는 표현이 두려운 걸까?
성공이라는 거대한 장벽은 초라한 자신만큼 글도 초라하게 만드는 걸까?

글이 자신을 구원한 다는 걸 모르는 청춘은 세상이 원하는 글 속에서
스스로를 죽이며 산다.

종수는 일어나는 모든 문제들에 끌려 다니면서 어제와 똑같은 방식으로
문제를 바라본다.

해미와의 조우.
분노조절로 사람을 때리고 감방에 간 아버지.
나 밴이 해미를 죽였다는 확신.
이 모든 문제들을 바라보는 종수의 해석은

삶을 힘들게 함과 동시에
무기력에서 빠져나오게 한다.


해미가 사라지고 니서야 종수는 해미라는 의미를 찾아 나선다.
종수의 해석은 우리 집
화장실에서
해미의 물건이 전리품처럼 남아있는 것과.
주인 없는 고양이가 우리 집에 있다는 것 만으로
해미를 내가 죽였다고 확신한다.

아무것도 아니었던 종수는
그렇게 나를 죽임으로써 자신의 분노를 이끌어내고 처음으로
글을 쓴다.

이제 종수는 진짜 소설가가 된다.
내가 세상을 향해 가지는 냉소와 무관심의 수수께끼를 종수가
풀어낼 수 일을지
난 종수의 손끝에 매달린다.
즐겁게......
종수의 차가운 칼날이 심장에 닿자.
난 편안해졌다.
이제 무의미의 축제를
끝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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