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의 도덕경을 읽는 사람은 많다.
일단 도덕경이라는 책을 읽으려는 시도가 호기심 어린 지성을 갖춘 사람이기도 하다.
호기심은 늘 지성을 깨우는 윤활유 역할을 한다.
하지만 도덕경을 다 읽고 이해하고 감동한다고 해서 도덕경을 제대로 읽었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도덕경은 그 사람의 지성과 깊이 딱 그만큼 읽히는 책이다.
그리고 정답이 없는 책이기에 그 해석과 받아들임 또한 무궁무진하다.
자신이 찾는 답을 자신의 방식대로 찾아내는 것이 독서의 한 측면이고,
정답이라고 떠먹여 주는 책조차도 정답을 의심케 하는 것 또한 독서의 한 측면이다.
같은 책이지만 책이라고 불리지 않는 책이 있다.
바로 성경책이다. 성경은 말씀이라는 용어로 읽힌다.
인류가 가장 많이 읽었다는 책 성경.
누구에게는 독서의 한 측면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생명과 진리의 말씀이다.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분의 말씀을 배워야 하는데... 성경은 바로 믿음이라는 세계의
가장 기초인 토대가 되는 것이다. 성경책 하나로 신학이라는 방대한 학문을 공부하고, 히브리어로 원문을 해석하고,
신앙인이 아니더라도 성경 속 세계관은 험난한 학문의 길인 것만은 주변을 보면 알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의 존재를 믿으면서도, 성경은 각색된 이야기책으로 인식했었다.
오히려 외전이라고 신앙인들은 거들떠보지 않는 도마복음서을 읽으면서
" 그렇지 이게 바로 예수님의 말씀이지.... 이게 바로 인간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예수님의 말씀이야"
하며 감탄하며 읽곤 했다.
성경을 읽지 않는다고 신앙인이 아닌 것은 아니다.
교회를 다니지 않는다고 신앙인이 아닌 것은 아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제도권 안에서 믿는 신앙은 늘
반발심을 안겨서 신앙으로부터 멀어지게 했다. 질문이 많은 나는 늘 목사들로부터 골치 아픈 신도로 찍히기 십상이었으므로
사유는 신앙의 적이라는 일부 목사들은 나와의
대화를 불편해 했다.
그리고 한동안 사유가 어째서 믿음을 방해하는 적이란 말인가!
라는 딜레마에 빠진 적도 있었다.
성경에서 예수님은 들판이나 집안에서 무리들과 늘 친구처럼 앉아서 질문하고 답하는 방식으로 대화했다.
부처님도 늘 그렇게 제자들과 대화했다.
아무도 지금의 스님들과 목사님처럼 권위로써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 어떤 이야기에도 성심성의껏 다 들어주고 질문과
괴뇌앞에
함께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하셨다. 예수님과 부처님은 상담가 이기도 하셨다.
예배는 제도권 성직자들에게 권위를 부여했다. 마치 신의 대리인인 것처럼 그 권한을 주고 섬기라고 까지 한다.
나는 내 안의 신을 섬기지 제도권 안의 신을 섬기지 않는다.
신앙은 여러 가지 측면이 있다.
인간의 마음의 근본인 감정들이 신앙을 믿는 기본인 것이다.
첫째는 감성적 측면의 신앙
둘째는 의지적 측면의 신앙
셋째는 지성적 측면의 신앙
신앙에서 유독 지성적 측면을 멀리하는 이유는 공동체나 성직자에게 의지해서 자신들 안에서 통제하기 위한 방편이다.
사유하지 않는 신앙은 사유를 세상적인 것이라고 가르치고, 하나님이 아닌 나를 중요시하여 하나님의 반대행위라고 가르친다.
이런 예배의 인도는 자신의 집 단안에서만 가두어 두고 자신들이 떠먹여 주는 교리만을
받아들이기를 강요하는 것이다. 신도들에게 맹신을 요구하는 것이다.
인간의 지성은 문학. 과학. 예술. 철학을 넘어 이제는 양자역학을 건너 어디 영역까지 갈지 모른다.
그런 인간들에게 믿기만 하여라고 얘기하는 하나님은 얼마나 어이없단 말인가!
전지전능한 하나님을 이렇게 무식하게 전하는 사람들도 죄를 짓는 것이다.
하나님을 깊이 알려고 하지 않은 죄! 하나님의 풍성하고 깊은 세계를 알려고 하지 않고 쉽게 돈 버는 일에만 몰두한 죄!
인간의 지성을 녹슬게 하는 죄!
성경의 기본정신은 절대로 변할 수가 없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고 인간의 지성이 변하고 있다.
기본정신에서 변하지 않게 성경은 다양하게 해석되어야 한다.
시대와 인간의 지성에 맞게 해석되어야 함이 마땅하다.
간음하지 말라는 말을 아직도 결혼제도에 적용하고, 인간의 순결에 적용하고, 도덕적 가치에 적용하는
그런 단순한 해석이 아닌 인간의 가치에 적용해야 한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시기에 인간의 거룩함을 아신다. 인간이 자신을 안다고 하여
하나님보다 우선일 수는 없다. 인간의 거룩함은 모두 하나님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을 거룩하게 하기 위해 인간은 지성으로 사유하고 그 사유의 은혜를 하나님의 축복으로 감사한다.
하나님을 믿는 방식이 모두 같을 수는 없다.
성경은 같은방식으로 집단적 믿음을
생산하는 책이 아니다.
성경의 비유와 수수께끼 탄식 기적 울부짖음
이 모든 외침은 누군가 에게는 살아있는 말이고
누군가에게는 문학적책이기도 하다.
나를 믿어라 라고 이야기하지만 믿지 않을 것이다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성경이 각색되든
아니면 각색이 아니든 그것이 중요하지 않은 이유는 성경은 누군가에게는 뼈를 쪼개고 골수를 쪼개는 말이기도 하고,
또 누군가에게는 수면을 부르는 말이기도 하고, 누군가는 말도 안 되는 헛소리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이 마음 안에서 살아있는 말이 되기 위해서는 다양한 해석으로 우리의 마음 안으로
파고들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 안에서 뜨겁게 살아나도록 해야 한다.
나라는 존재의 의미를 일깨우고 그 사랑의 의미가 깊이 전달되도록 그래서 내 마음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뜨거워져서 그 사랑으로 나라는 존재가 한없이 작아지는 경험을 느낄 수 있도록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도록
감성에 호소하고 지성으로 현명하고 지혜로워지고 튼튼해져서
의지적 측면으로 나타나 그 사랑이 실천으로 이어져서
진짜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삶으로 이어져야 한다.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하나님은 모두를 사랑하신다.
자신의 피조물이 행복해지기를 원하고
서로 사랑하고 사랑안에서
평온을 누리기를 원한다.
성경은 그 사랑을 가르치기 위해서 그 힘든 비유와 이야기들을 엮으신 것이다.
누군가 떠먹여주는 방식으로
성경읽기를 해서는 안된다.
내가 주체가 되어 일대일로 성경을 해석하고
그 말씀이 살아있도록 하기위해서는
지성을 갖추고 공부하고 사유해야한다.
성직자들의 해석에만 의존해서는
성경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없다.
인간이 그 사랑을 알았을 때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에 머리 숙인다.
믿어져서 사랑하는 게 아니라 사랑을 느끼기에 믿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 한 구절을 믿지 않는 누군가에게 전할 때
내 마음을 먼저 전해져야 한다.
내가 얼마나 너를 사랑하는지...
그리고 그 사랑이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그 사실을...
우리는 서로에게 늘 알 수 있도록 서로의 마음부터 먼저 살펴야 한다.
누군가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는
먼저 내가 너의 마음을 헤아리고 사랑하고 있음을 전해야 한다.
내 뜨거운 마음이 먼저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대리인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주체이다.
바로 그 사랑안에서 사는 존재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