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해방하는 법

나의 해방 일지

by 토끼



우리는 관계에서 자신의 사랑스러움과 멋짐을 발견하는 순간이 있다.
반대로 자신의 볼품없음만을 확인하게 되는 순간도 있다.



사랑스러움과. 멋짐. 볼품없음.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자신의 정체성이 시시각각
변하는 일상이 우리의 살아있는 시간 들이다.
나라는 사람은 늘 변함이 없는데.. 우리는 관계들 속에서 언제나 변하고 새롭게 태어난다.
"나" 나를 이런 틀 속에서 해방시키고 싶다.
나의 해방 일지처럼......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일상이 내레이션 속에서 다큐처럼 반복되는 드라마의 첫회를 보다가 박해영 작가의
신작 드라마임에도 불구하고, 중간에 드라마를 중단했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거지... 그렇게 잠시 드라마를 접고 잊었다.






얼마 전 동료의 입에서 "날 추앙해 줘"라는 뜬금없는 대사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추앙해 달라고 뭐야! 뭔 소리야.요즘 추앙이란 단어를 쓰는 사람이 있어 너무 과하잖아?"
곧바로 핸드폰을 검색을 했다.


추앙; 높이 받들어 우러러봄.


동료가 깔깔거리기 시작했다.
"너도 드라마 속 남자 주인공 하고 같구나! 단어 검색부터 하고.... 추앙이란 뜬금없는 대사로 지금 대박 난 드라마가 있잖아!
나의 해방 일지 , 그래서 다시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다.


2화가 끝나자. 내 인생에 또한 편의 인생 드라마가 탄생하고 있음을 느꼈다.


드라마는 경기도 촌구석에 사는 견딜 수 없이 촌스러운 염 씨 집안의 한가족과 주변인들 그리고 유일한 외지 사람인 미스터리한 남자 구 씨의 이야기이다.
염 씨 집안의 삼 남매는 아버지가 만드는 싱크대 공장에서 묵묵하게 말없이 일만 하는 구 씨라는 남자를
그림자처럼 대한다. 이름도 성도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그저 일하는 남자. 구 씨 그저 구 씨 라고 하니 구 씨인줄 안다.
큰딸 기정 둘째 아들 창희 막내딸 미정. 삼 남매는
서울로 한 시간 반 거리를 출퇴근하면서 빠듯하게 살아가고 있다.
올드미스 큰 딸 기정은 말한다.

" 밝을 때 퇴근했는데, 밤이야. 저녁이 없어"

그녀는 올 겨울엔 아무나 사랑할 거야라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둘째 아들 창의는 여자 친구와 헤어진 게 자신의 구질구질한 삶 때문이라고 자책한다.
" 여자들 만나보면 보이는 눈빛 있어.
아 이놈 별거 없구나"
그때
막내딸 미정도 생각한다.
우리를 지치고 병들게 했던 건 다 그런 눈빛 들었다고...


" 생각해 보면 , 내 인생의 x개새끼들도 시작점은 다 그런 눈빛.. 너 부족해라고 말하는 것 같은.
하찮은 인간이 된 것 같은 느낌
우리를 지치고 병들게 했던 건
다 그런 눈빛들이었다.
자신의 사랑스러움을 발견하고자 달려들었다가
자신의 볼품없음만을 확인하고 돌아서는
반복적인 관계... 어디서 답을 잦아야 할까?"


그녀는 지루한 현재를 벗어나고 싶지만 아무런 변화 없는 일상을 묵묵히 버티면서 지내고 있다.
염사장은 자식들이 경제적 독립을 못하고 아버지에게 얹혀사는 것이 불만스럽다.

염사장은 말이 없는 사람이다. 구 씨도 말이 없다. 둘은 말없이 눈빛으로 손발이 척척 잘 맞는 사이지만 정작 서로에 대해 아는 것은 없다.
구 씨는 일이 없는 나머지 시간은 먼산을 바라보며 술만 마신다.







어쩌다 일이 없는 날은 하루 종일 술만 마시다. 술에 취해 코가 깨진 줄도 모르고 다음날 깨어 피범벅이 되어 옆집에 사는 염사장의 등에 업혀
병원으로 가는 날이 종종 있다.

평생을 일만 하고 살아도 희망이 없는 부모를 바라보는 삼 남매는 삶에 지치고 사랑에 지치고 자기 자신에게 지친 나머지 서로 살가운 가족이 아니라 늘 뭔가 어긋나 버린 일로 서로 티격태격하면서 싸운다.


막내 미정은 전 남자 친구 사업자금을 위해 돈까지 빌려주었다가 남자가 잠적하고
은행으로부터 빛 독촉을 받고 있다. 부모님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맞은편에 혼자 살고 있는 구 씨 집으로
전입신고를 한다.
' 우편물 좀 받아주세요. 집에서 알면 안 되는 우편물이 있어서요. 죄송해요. 급해서 여기 주소를 썼어요."

구 씨는 미정의 부탁을 그저 아무 말 없이 듣기만 하고 아무런 대답도 없이 들어가 버린다.


미정은 겸연쩍게 서 있다 집으로 돌아온다.
처음으로 미정이 구 씨를 찾아가 말을 건네는 장면이다.
어느 날 구 씨가 일을 하다 말고 멀리서 우편배달부를 발견하고 빛의 속도로 달려간다.
그녀의 우편물을 대신 받아주기 위해서였다.
다음날 처음으로 구 씨가 미정의 뒤통수에다 대고 말한다.


"우편물 왔어."


두 사람은 이렇게 서로 자신의 세계 속에서 서로를 향해 타인의 문을 두드린다.
며칠 후
자신의 돈을 떼먹고 잠적한 남자 친구가 전 여자 친구에게 도피한 사실을 알게 된 미정은
늦은 밤 집에 돌아오다 집 앞에서 오늘도

어김없이 혼자 술을 마시고 있는 구 씨를 본다.
그녀는
망가진 사람이 오히려 더 정직하고 투명하게 보이기는 그날이 처음이었다.


내성적이고 말이 없는 미정이는
용기를 내서 술 취한 구 씨에게 걸어 간다.
그리고 소리친다.

" 날 추앙해요"


구 씨가 술을 마시다 말고 그녀를 본다.
그녀는 다시 힘 있게 말한다.

" 겨울이 오면 살아있는 건 아무것도 없고 할 일도 없어요. 당신은 그 무엇이든 해야 해요.
그러니까 날 추앙해요. 개새끼 새 새끼
지금까지 내가 만난 놈들은 다 개새끼. 난 한 번도 채워진 적이 없어요. 한 번은
채워지고 싶어요. 그러니까 날 추앙해요."

구 씨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미정을 본다.

" 내가 이 촌구석에서 술만 마시는 이유가 뭔 줄 알아? 난 사람이랑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이 드라마는 느리다. 주인공들이 주고받는 대화는 반박자 느리다. 한마디를 짧게 하고 잠시 쉰다.
말이 쉰다. 쉬는 대화는 내 심장을 편안하게 한다. 드라마를 보고 있자니
시간도 천천히 가는 것 같다. 하지만 지루하지 않다. 천천히 가는 시간은 내 수명을 연장시킨다.
혼자 있을 때는 잠시 드라마 속 대사들을 떠올리면서 또 느리게 웃는다.

그래서 구 씨는 미정이를 추앙하게 됐을까?
구 씨는 왜 촌구석에서 술만 마시고 일만 하고 있는 걸까?
미정과 구 씨의 연애는 이야기의 양념 같은 것이다.

진짜 이야기는 등장인물들 하나하나 자신의 틀을 깨고 조금씩 조금씩 밖으로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과정들을 담고 있다.
우리는 무엇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고 싶은가!

" 내가 좋아하는 것 같은 사람들도 가만히 보면 다 불편한 구석이 있어요.
진짜로 좋아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혹시 그게 내가 점점 조용히 지쳐가는 이유 아닐까. 늘 혼자라는 느낌에 시달리고 버려진 이유가 아닐까"


염미정이라는 인물은 늘 아무 감정도 없는 것 같은 표정으로 말없이 묵묵히 일상을 산다.
회사에서도 집에서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빠짐없이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아무도 날 좋아하지 않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가 않은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지쳐간다. 매일매일 겨우겨우 먹고살아야 하는 경제적 어려움보다 더 힘든 건
스스로의 결핍으로 삶에 대한 아무런 즐거움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 그녀가 알코올 중독자에 말수도 없고, 이름도 성도 모르는 그런 남자를
자신을 채워줄 남자로 선택한다.
그리고 말한다.
" 무슨 일 있었는지 안 물어. 어디서 어떻게 상처받고 이 동네 와서 술만 마시는지도 안 물어 한글도 모르는 인간이어도 상관없어.
술 마시지 말란 말도 안 해 그리고 안 잡아. 내가 다 차면 끝"
구씨가 묻는다.

"추앙은 어떻게 하는 건데?"

"응원하는 거요. "

추앙의 의미는 다양하다.

말말말
오늘도 참 많은 말들을 했다.
누군가는 내 말에 눈을 반짝거렸고, 누군가는 내 말에 지루해서 핸드폰 화면을 힐끔거렸다.
누구는 내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자기 말로 치고 들어왔고, 누구는 조용하게 경청해 주었다.
나는 안다. 나를
말로 사람을 설득하려거나 환심을 사기 위해 나를 홀리려는 뉘앙스가 깔린
많은 말의 패턴들과 뉘앙스들을...

미정이 좋아하는 동네 언니 현아와의
대화가 맘에 콕 박힌다.

미정 ; 사람들은 말을 참 잘하는 거 같아.

현아; 어느 시점을 넘어가면 말로 끼를 부리기 시작해. 말로 사람 시선 모으는데 재미 붙이기 시작하면 막차 탄 거야.
내가 하는 말 중에 쓸데 있는 말이 하나라도 있는 줄 알아. 없어 하나도.... 그러니까 넌 절대 그 지점을 안 넘었으면 좋겠다.
정도를 걸을 자신이 없어서 샛길로 빠졌다는 느낌이야. 너무 멀리 샛길로 빠져서 이제 돌아갈 엄두도 안나.
나는 네가 말로 사람을 홀리겠다는 의지가 안 보여서 좋아 그래서 네가 하는 말은 한마디 한마디가 다 귀해.

말말말.
가슴 뭉클한 말들이 있다. 돈하나 안 들이고 사람을 편하게 해 주는 말.
말을 하는 능력보다 받는 능력이 더 남는 장사다.

누군가는 아무렇지도 않게 들리는 말에 누군가는 감동받는다.

심장이 뛰는 이유에 대히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창의의 친구 오두환은 자신이 좋아하던 여자가 남자와 헤어졌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심장이 뛰었다고 고백한다.
이에 미정은 심장이 뛰게 좋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한다.
자신은 심장이 막 뛸 때는 늘 끝이 안 좋거나 부자연스러울 때라고 한다.
정말 좋다 싶을 땐
반대로 심장이
느리게 가는 거 같던데....
라며 구 씨를 생각하며 미소 짓는 미정.

그때 창의는 사람이 좋아서 심장이 뛰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좋을 땐 그냥 좋아.
심장이 뛸 땐
잘하면 가질 수 있겠다 싶을 때
내 건 그냥 내 건가 보다 해
내게 아닌데
아닌 걸 알겠는데
잘하면 가질 수 있겠다 싶을 때
그때 뛰는 거야. 심장이......

말말말 정말 공감 가는 말이다.
이런 대사를 쓰는 작가는 분명 마음이 따뜻한 사람일 것이다.

상대를 앞에 두고 독백처럼 아무 말이나 하고 있는데도
그 어떤 얘기를 해도 공감받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사람이 있다면
그 대화는 쉬는 말이다.
말이 쉬려면 온전하게 나에게 집중해서 이야기를 해야 한다.
상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중요하지 않다.
온전하게 내면에서 생각나는 것들을 아무렇게나 쏟아내고 있는데도
상대가 내 이야기를 반짝이는 눈으로 듣고 있다면
내 이야기는 살아서 꿈틀대고 나 자신의 히스토리가 된다.
그때 , 내가 나답고 사랑스럽다.

나의 해방은 지금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나에게 늘 이런 말들을 해 주고 싶다.

길 한복판에 버려진 나라고 해도, 어느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겉돌고 있어도,
제자리에 있지 못하고 주변을 맴돈다고 해도,
지금 어디에도 어울리지 않는 나라고 해도,
나의 해방은 더 나은 세상을 찾아 밖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대로의 모자란 나로 점점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나의 해방 일지이다.
나는 내 안으로 점점 더 파고들어 웅크리고 있는 나를
더더더 만나 재회하고 손잡아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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