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집 막내 아들과의 사랑

마지막 만남

by 토끼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는 날이면 가끔

15년 전 단정히 머리를 두 갈래로 묶은 은희 생각이 난다.

그리고 얼굴도 한번 보지 못하고 상상 속에만 존재하던

재벌집 막내아들도 떠올려 본다.


아파트분리 수거장에서

유리병라벨을 떼어내느라 낑낑대던 그녀의 뒷모습을 신기하게 보다

말을 걸었다.

"멋지네요. 재활용 버릴 때 라벨 떼어내는 거 모르는 사람도 많은데..."

그녀가 뒤 돌아 섰을 때 라벤더 향이 퍼지고, 내 동공이 커졌다.

이 허름한 동네에 어떻게 저렇게 예쁜 여자가 살고 있단 말인가!

" 재활용은 꼼꼼히 정리해서 버려야 나중에 정리하시는 분들 손이 안 가죠"

Tv속 드라마에 존재할 것만 같은 그녀의 목소리는 가늘고, 소녀 같았다.

그 남자는 어땠을까?

아마도 그녀의 단아하고 고운 얼굴에 첫눈에 반했을 것이다.

외모 따위가 뭐가 중요해라고 생각하는 철벽을 친 남자라고 해도

그녀가 웃는 모습을 본다면 그녀에게 반할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만났다.


처음 말을 트고 몇 번 눈인사를 하고, 그리고 같이 밥을 한번 먹고, 서로의 집을 오가며

왕래를 했다. 쌍둥이 아이들을 우리 집에 맡기고 그녀는 외출을 하기도 했다.

그녀는 어느 날 울먹이며 말했다.

" 언니 제가 산후 우울증이 심해서 아파트 베란다 앞에서 울기도 많이 했는데..

언니 안 만났으면 뛰어내렸을지도 몰라요 전생에 언니는 우리 엄마였을지도 몰라요.."

" 기석 씨가 자상하잖아. 대기업 직원에 능력 있어, 집안일도 잘 도와주고, 은희남편만 한 남자 만나기도 힘들어"

" 내 집마련, 고맙죠. 하지만 결혼하자 마자 갑자기 애가 둘씩이나 생겨보세요.

엄마가 도와주고, 남편이 도와줘도 매일 매일이 전쟁이예요.

나 진짜 이렇게 살아야 하나 싶기도 하고, 너무 힘들더라고요"

그녀와 함께 다닐 때는 언제나 남자들의

시선이 따라다녔다. 그럴 때 난 그런 남자들의 시선을 훔쳐보는 즐거움이 있었다.

" 근데 은희야 넌 연예인 이나 하지.? 오디션 같은거 한번 보거나.

길거리 캐스팅 뭐 그런 건 받아 본 적 없어? 이렇게 이쁜 애가 왜 결혼은 일찍 한 거야?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 언니 난 거울을 보면 스스로도 딱2프로가 부족한 그런 느낌이야.

연예인을 하기에는 뭔가 평범한 얼굴. 근데 내성격 알잖아 언니도,

끼도 없고, 끈기도 부족하고, 그냥 평범한 사람. 딱 그 정도예요"

"무슨 소리야 너 정말 예뻐? 지금이라도 안 늦었어. 뭐라도 시도해봐 주부모델 그런거도 있잖아.?"

" 전 그런 욕심이 없어요. 애 둘키우는것도 이렇게 힘든데... 전 두 가지 이상은 못해요.

살림만으로도 너무 벅차요. "


그녀는 집안 꾸미는 걸 좋아했다. 철마다 커튼을 바꾸고, 예쁜 그릇을 모으고, 화초를 바꾸면서

집안 분위기를 바꾸었다.

그녀는 가끔씩 싫증이 나서 들고 다니지 않는 명품가방을 나에게 선물로 주었다.

싫증이 났다고 해도 내 눈에는 새것이나 다름없는 가방이었다.

어느 날은 붉은광이 나는 앙증맞은 에나멜가방을 들고 현관문을 들어섰다.

" 너 혼자서 웬일이야? 애들은?"

" 엄마가 주말에 봐준다고 해서 데리고 갔어"

" 언니 이 가방 너무 튀려나? "

" 야 난 그런 거 소화하기 힘들어 받혀 입을 옷도 없고"

" 에이 언니도 좀 과감하게. 한번 이런 거 들고 다녀봐"

그녀는 가방을 구석에 놓고, 소파에 앉았다.

이상했다. 그녀는 그날따라 이상하리 만치 흥분되고, 불안하고, 초조해 보였다.

" 뭐 마실래?"

우리는 둥굴레차를 뜨겁게 마셨다.


그날따라 그녀는 대화 중에도 휴대폰에 정신이 팔려 있어 뭔가 불안해 보였다.

" 너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 언니는 결혼 전에 사귀었던 남자한테서 연락이 오면 어떻게 할 거야"

" 글쎄....... 모르겠어. 험한 꼴 보이고 헤어진건 아니지만 만나면 어떤 감정이 들지.. 궁금하긴 하다"

그녀의 얼굴에서 묘한 표정을 읽고 나서

" 왜? 옛날 애인이 너 보고 싶데? 뭐야 뜬금없이. 옛 애인한테 연락이라도 왔어?"

나는 넘겨짚어 보았다.

" 그게 그러면 안 되는 거 알고 있는데...

언니 나 어떡하면 좋아. 헤어진지 7년이 됐는데, 그애 목소리를 들으니 심장이 쿵쾅거리고,

손이 떨려. 이거 무슨 감정인지 모르겠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안은 그녀는 작은 비명소리를 냈다.

은희가 이렇게 흥분하고 안절부절 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은희는 자신의 이야기를 많이 털어 놓았지만

남자 이야기는 처음이었다.


그리고 재벌집 막내아들과의 인연을 시작했다.

그녀는 결혼 전 유치원교사였다. 어릴 때부터 아이들을 좋아해서 일찌감치 자신의 진로를 결정했다.

예쁘다는 이야기를 늘 들으면서 자랐지만 그녀는 자신의 외모에 그다지 관심이 었었다.

남자친구도 별로 만들지 않았다. 따라다니는 남자들은 늘 그녀 주변을 맴돌았지만 그녀는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 탓에 곁을 주지 않았다. 몇 번의 연애는 그녀에게 좋지 않은 기억들만 남겼다.

남자들은 그녀를 사귀기 위해 처음에는 간쓸개를 다 빼줄 것처럼 하다가 연애에 성공하고 나면

금방 시들해졌다. 그녀가 처음 잠자리를 한 남자는 동갑내기 대학생이었다.

그 남자와 헤어진 이유는 간단했다. 관계가 끝난 뒤 자신에게 아무런 포옹이나 애정표현 없이

싸늘하게 뒤돌아서는 남자의 등 때문이었다. 매번의 잠자리에서 느끼는 그런 모습에서

은희는 섹스뒤의 외로움을 느껴야 했다.

그 남자와 헤어지고 나서 그녀는 당분간 연애를 쉬었다.

그해 가을 친구의 결혼식장에서 재벌집 막내아들을 만났다.

" 그냥 평범해 보이는 청년이었어. 신랑 측 친구쯤으로 알았는데. 피로연에서부터 계속 날 따라다니더니

결혼식 끝나고 집에 가는데. 차를 몰고 가다 길거리에서 내 앞에 서는 거야"

" 야 드라마네 드라마야"

그렇게 두 사람은 만났다.


" 처음데이트 할 때는 혼자만 나왔고 아무 얘기 없었으니까 몰랐어 재벌집 막내아들이라는 걸.... 나중에 경호원들이 따라붙더라고..

그래서 알았지... 아 말로만 듣던 재벌집 아들이구나"

두 사람은 서로 사랑했다. 그녀는 잠시나마 신데렐라 되는 꿈을 꾸어 보기도 했다.

그는 다정다감하고, 잘생기지는 않아도, 스마트하고, 돈 있는 티를 안내는 남자였다.

그들이 호텔에 방을 잡으면 언제나 경호원들이 룸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 언니 처음 그 남자하고 잤던 그날을 잊을 수가 없어. 그 남자는 마치 날 악기를 다루듯 섬세하게 만져 줬어. 그 손길하나하나에

내 몸은 소리를 내고, 반응했어. 그 애는 내가 만난 남자 중 날 가장 잘 연주하는 연주가였어"


그들은 오래 호텔에 머물지 않았다. 길어야 다섯 시간이었다.

남자는 아쉬워하는 그녀의 볼에 키스를 하고 그녀의 가방에 작은 봉투하나를 넣으며 말했다.

" 너한테 내 사랑을 모두 주고 싶은데... 나 이렇게 밖에 줄 수가 없어. 예쁜 가방하나 사서 다음 만날 때 들고 와"

" 언니 그 애가 준 돈을 난 거절하지 않았어. 왜냐면 그날 깨달았어. 내 사랑은 선을 넘을 수는 없구나 딱 여기까지 구나"


남자는 그렇게 한 번에 100만 원 내지 500만 원씩 수표를 마치 숨은 그림 찾기 하듯

여자의 소매 속에 호주머니 속에 가방 속에 여자의 구석진 곳에 숨겨서 주기를 좋아했다.

그녀는 의레그렇듯 그와 헤어지고 나면

몸 구석구석을 뒤지면서 그가 숨겨둔 돈을 찾아내는 즐거움에 익숙해졌다. 그돈으로

명품가방을 사고 옷을 사고, 부모님 용돈을 드리고도 돈은 넘쳐났다.


" 어느 날 신문을 보는데 그 애가 결혼한다는 기사가 떴더라고.... 나한테 사전에 말 한마디 없었어.

그래서 헤어졌어 그게 끝이야"


그녀의 이야기는 밝은 오후부터 저녁노을을 잡아먹고 어둠이 덮치도록 계속되었는데...

한마디 대꾸도 없이 난 듣고만 있었다.


" 야 난 그런 얘긴 드라마 속에만 존재하는 줄 알았어. 잘했어. 헤어져야지... 나쁜 놈..."

" 난 그때 이후로 많이 망가져서 살았어. 사랑따위가 너무 시시하더라구. 애들 아빠 안 만났으면 평생 결혼 안 했을지도 몰라"

" 그런데 그런 놈을 왜 또 만나? 미쳤어? 진짜 만날 거야?"

그녀는 내 말에 대꾸도 하지 않고, 벽시계를 보더니 일어나서 외투를 걸쳤다.

" 언니한테 별소리를 다했다. 나, 갈게

언니 그냥 안 들은 걸로 해줘 기석 씨 왔을지도 몰라 "

그녀가 사라지고 난 뒤 넋이 나간 사람은 나였다. 알 수 없는 허탈감과 자괴감이 덮쳐왔다.


앞으로 그녀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 걱정이 됐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떠오르지 않았다.

은희는 그 남자를 만나지 않았다면 어떤 인생을 살았을지 상상을 하다가.

거실구석에 덩그러니 놓인 에나멜 가방을 보았다.

가방을 메고 거울에 비춰보았다.


이런 걸 받으면 안 되지만 내가 해준 게 더 많으니...

" 가방은 돌고 돌아 또 새로운 주인을 만나고 사랑도 돌고 돌아 또 새로운 정인을 만나는 구나"

그녀의 옷방 안에는 명품가방이 유독 많았다. 그 가방들 하나하나가 그 남자와의

전리품들이었을까! 그 남자는 은희를 자신의 정부로 남기고 싶어 했지만

은희는 당당하게 그와의 이별을 택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왜?

은희는 정말 그 남자를 또 만날까? 자신이 그 남자로 인해 망가졌다는 걸 알았음에도

왜 이제 와서 또?....

그날 이후 은희는 내전화도 받지 않고, 집에 찾아가도 없었다. 날 피하는 것이 분명했다.


스스로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린 걸까! 그녀가 걱정됐지만

그녀를 만날 수 없으니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일주일 뒤 저녁을 먹고 식곤증에 졸고 있다가 그녀의 전화를 받았다.

전화 속에서 그녀가 울고 있었다.

" 언니 나 지금 기분이 거지같아. 나좀 만나러 와 줄레"

공원벤치에 그녀가 앉아 있었다.

분홍색 원피스에 연한베이지색 구두를 신고, 짙은 화장을 하고, 링이 달린 귀걸이를 한 그녀 옆에 , 연두색 가방이 놓여 있었다.

은희는 한참을 울었는지 마스카라가 뭉개져 있었다.

직감적으로 그 남자를 만났다는 확신이 왔다.

" 언니 나 정말 한심한 거 같아. 살아오면서 지금처럼 내가 싫었던 적은 처음이야."

" 너 기어이 그 남자를 만났구나..."

" 한 번만이었어, 딱 한 번만 한 번만 보고 싶었어.그 사람을 만나고 다시는 안만 날생각이었어. 그런데

나 지금 너무 비참해."

" 이제 안만나면 되지... 만났으니까 된거 아냐? 울기는 왜 울어"

그녀는 호주머니를 속으로 손을 집어넣기도 하고, 옷을 벗어 다시 털어보기도 하고,

가방을 구석구석 살피다가 소지품들을 의자 바닥에 내동댕이 쳤다.

" 언니 없어"

" 뭐가 없어?""

" 우리 현이 정아 노르웨이산 유모차 사려고 벼르고 있었는데. 돈이 없어

나 한심한 거 아는데 이런 내가 너무 싫은데.... 그래도 이건 아니잖아!"


보름달이 걸린 가을밤이면 은희가 서럽게 울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녀가 준 붉은색 에나멜 가방은 15년이 지난 지금도 윤이 반짝반짝 난다.

그녀를 괴물로 만든 재벌집 막내아들은

또 어떤 여자를 괴물로 만들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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