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면증은 혼자가 아니다

모두 함께다.

by 토끼

장시간의 핸드폰 사용. 밝은 조명, 시끄러운 소음. 이런 환경이 잠을 방해하는 요소가 확실했던 시절이 있었다.

암막커튼을 치고, 아주 잠깐의 틈새의 빛도, 문틈사이로 들려우는 바스락거리는 소리도, 잠자기 전 보았던

짧은 동영상도 신경 쓰여, 잠들지 못했다. 하지만 이것은 수면을 방해하는 개개인의 이유일 뿐이고,

그때그때 상황의 변화이다. 내 마음이 그런 상태를 허용하고 받아들이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지금의 나는 이런 요소들을 완전히 허용했고, 아무런 방해 요소가 아니다.

커튼을 치지 않아도, 밖에서 소리가 들려와도, 핸드폰을 사용해도, 잠과는 상관이 없다. 마음이 이것을 개의치 않거나

수용하거나 허용하면 아무런 문제가 아니었다.


인간의 하루 일상은 무의식과 습관으로 살아진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판단력과 이성은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는데, 적절한 처세와 인간성을 유지시켜주지만 그 어떤 긴박한 상황이나 힘든 일에 처했을 때 우리를 지배하는 것은

무의식과 습관이다. 아무리 머리로 이해하고, 마음으로 받아들이려고 해도 무의식에서 뼛속깊이 박힌

습관과 인식은 하루아침에 바뀌지가 않는다. 무의식을 변화시키려면 자신의 삶의 방식과 사고의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고, 변화가 필요하다. 지금까지의 생각으로는 변화될 수가 없다.

불면증을 개선하기 위해 모든 장해 요소를 없앴다.

신랑이 내는 아주 조금의 소음조차 괴로워 시골에 내려가 혼자 잠을 잤지만 실패했다.

그때 나의 상태는 환경을 바꾼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라는 걸 머리로도 마음으로도 알았지만,

무의식이 아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했다.

소음과, 빛, 방해 요소들을 받아들이고, 허용하고, 지금의 상황에 저항하지 않는 마음의 상태를

나는 현존이라고 표현한다. 나만의 해석으로 불면증을 바라보고 직면하게 된 건

나를 알아가고, 나의 삶을 살면서 가능해졌다.

지금 내 안에서 이런 질문을 한다. 이런 글을 일기장에 쓰는 건 문제없지만 다수가 읽는 공간에서

불면증을 완치한 사람도 아니면서 이런 글을 쓰는 건 너무 무책임하거나 신빙성이 떨어지는 게 아닌가!

과연 나는 이 글을 쓸 자격이 있는가? 하는 질문에

이런 통쾌한 답이 나왔다. 아직도 불면이 진행 중이기 때문에 당당하게 쓸 수가 있다.

직면한다는 건 이런 것이다. 불면을 달고 살지만 괴롭지 않은 것이 불면을 완치했다는 사람보다 더

신빙성이 있고, 책임 있는 글이다.

하지만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은 불면에 익숙해지는 이런 과정들을 논리적으로 이해시킬 수가 없고,

주관적이며 긴 시간의 녹녹지 않은 과정이라는 것이다. 불면증을 깨닫는다는 이런 추상적인 언어가

불편할 수도 있지만 이것이 지금 평온한 이유이며

불면, 삶, 고통, 이 모든 게 단지 불면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다.

지금 나는 불면에 관해 쓰고 있지만 이것은 다른 모든 나에게 닥친 문제들의 해결 방법들과 다른 것이 없기 때문이다.

자기를 알아가고, 자신의 삶을 살면, 불면이나 불안이나 두려움이나 트라우마나 우울이나 모두 다 같은 방법으로

수용하고, 해석하고, 받아들인다.

불면은 단지 잠을 잘 수 없는 그런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마음이 어딘가에 억눌려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불면은 단지 넓은 숲 속의 나무한그루 일뿐이다. 숲의 환경을 바꾸지 않으면 나무는 말라죽을 것이다.

몸이 아픈 지인과 어제 긴 시간 하루를 보냈다. 그와 나는 어쩌면 같은 환우인지 모른다.

그는 정신과 약을 한 움큼 먹으면서 지금은 깊은 잠을 자고, 일상생활을 하고 있지만 여전히 과거의 무의식과

습관에 매여 살고 있다. 그는 말한다.

" 생각해 보면 작년 이맘때 보다 내 몸은 점점 더 나빠지고 있는 거 같아."

그는 여전히 과거의 자신을 그리워한다. 과거의 자신의 몸과 지금을 비교한다.

" 지금 이렇게 일상을 살고 있고, 웃을 수 있고, 걸을 수 있고, 맛있는 걸 먹으면서 즐거운데... 뭐가 문제야. 과거의 몸과 비교하지 마"

" 아니지 아니지 과거의 몸과 비교하는 게 아니라, 원인을 찾고 해결책을 찾으려면 과거의 상태를 기억하고, 늘 체크를 해야지

그런 추상적인 해결방법은 궤변이야. 그건 너의 방식이지 나의 방식이 아니야"

나는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다.

" 그렇지. 해결 방법을 찾아야지. 우리 같이 찾아보자. 작년 이맘 때보다는 몸이 안 좋아졌지만 그래도 최악으로 힘든 작년말보다는

좋아지고 있는 건 확실하니까"

그는 이 말이 듣고 싶었을 것이다. 그의 표정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는 아마도, 숲 속에서 헤매고 있는지 모른다.

숲을 살리기 위해 옆에 병든 나무를 잘라내고, 또 다른 병든 나무들이 있는지 매일매일을 찾아 헤매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무들을 잘라낸다고, 숲이 좋아지지는 않는다.

숲을 둘러 싼 공기를 바꾸고, 숲을 둘러 싼 바람을 좀 더 불게 하고, 햇살을 좀 더 쬐게 하고, 숲의 문을 활짝 열어젖혀야 한다.


결국 불면증의 문제는 내 삶에 대한 문제와 귀결된다.

어느 것 하나 저 홀로 외롭고 힘들고, 아픈 건 없다. 불면은 우울과 불안과 슬픔과 걱정과 모두 한쏟밥을 먹고 있다.

저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행복하지 못하면 지금 이 순간 내가 느끼는 이 느낌 이 마음을 즐기지 못하면

이 순간순간이 모여, 숲 속에 병든 나무들만 계속 만들 뿐이다.


장지오노의 소설 나무를 심은 사람에서 엘제아르 부피에 노인은 혼자 숲 속에 살면서 수십 년 동안 나무를 심었다.

황무지 마을을 풍요로운 숲의 마을로 바꾸어낸 결과 뒤에는 노인의 헌신적이고 위대한 노력이 있다고

사람들이 극찬하지만 노인에게는 헌신도 아니고, 위대한 노력도 아니었다.

그저 단지 일상 속에서 작은 나무 한그루를 심었을 뿐이다.

지금이 순간의 바람과 햇살, 공기에 만족하며, 아무런 삶의 비교나 갈등 없이 이 순간 속에서 심는다는 행위를 한 것뿐이다.

그것은 부인을 잃고, 자식을 잃고, 은둔한 한 늙은 사내가 유일하게 자신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자신만의 삶이고, 자신만의 언어이며, 자신만의 일이었다.

숲은 지금도 그렇게 자신만의 방식으로 나무들을 자라게 한다.

나의 몸도 마음도 그렇게 지금 이 순간 속에서 평온한 안식을 누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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