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지병으로 남편을 잃은 지인의 장례식에 다녀왔다.
보름이라는 시간이 애도의 시간으로는 충분하지 않지만
그녀가 마음 쓰였다.
전화기 너머 그녀의 야윈 손을 생각해 본다.
"괜찮은 거지?"
그녀는 침묵한다.
" 오늘 며칠 만에 화분에 물을 줬어"
전화기 너머 들려오는 그녀의 언어는 하나의 상형문자처럼
소리의 언어로 맘속에 들어왔다.
그녀는 정말 화분에 물을 주기는 했을까?
단지 자신의 마음을 숨기기 위해
어떤 말을 찾았는지 모른다. 자신의 슬픈 마음을 덮기 위해
아주 적절한 단어를 찾았는지 모른다.
그 짧은 말 안에서 그녀가 혼자 있고 싶다는 걸 느꼈다.
" 잘했네. 그럼 쉬어 끊을게."
" 고마워"
인간들의 언어는 감정을 담고 있다. 은유와 메타포 속에서 언어의
조합은 마치 감정의 여러 파편들을 엮어 하나의 느낌들을 만들어 내는지 모른다.
"나"라는 자아를 정의할 때
나는 이런 표현을 쓰곤 한다.
경험하고 있는 기억들.
우리의 과거는 사건사고라는 경험적 기억의 구조안에
감정이라는 복잡한 구조가 섞여 있어.
과거의 기억 속에서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나라는 존재를 소환하기도 한다.
트라우마라는 이름으로 튀어나오기도 한다.
언어와 기억은 글로써 새롭게 재생되고, 왜곡되며, 감정들을 변화시킨다.
마음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 기억들을 저장한다.
마음은 하나의 나무와 다른 나무의 접목처럼
다른 누군가의 정신적 언어와 접목되어 하나의 생각과
사유를 흡수하고, 그렇게 그 사람들의 마음을 받아 나라는
인격체가 변화되어 간다.
내 기억은 무수한 사건들과 경험 속에서 만들어진 데이터를 수집하고
분석하여, 인간들과의 관계에서 나의 위치를 정한다.
감정이 없는 언어체계를 가진 존재에게 기억이란 어떤 의미 일까?
인간에게
하나의 생명체가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소통과 교감이 필요하다.
개미를 존재라고 칭하지 않고, 바퀴벌레를 하나의 존재로 여기지 않는다.
하지만 강아지나 고양이나 그 어떤 의식체계가 하나의 존재로 느껴져야지만
인간의 그 생명체를 존재라고 인정한다.
그렇다면 인간과 소통이 가능하다고 해서 그 물건을 하나의 존재로
인정할 수 있을까? 인간의 형상을 하고, 인간을 케어해 주는
로봇을 우리는 하나의 존재로 인정 할 수 있을까?
영화 애프터 양에서 안드로이드인간 양 같은 존재 말이다.
양은 인간을 케어하는 돌봄형 안드로이드이다.
내 눈빛을 보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양은 내 마음에 연결되어 있지 않다.
프로그래밍화된 시스템에 의해 행동하고 말할 뿐이다.
수천수만 개의 경우와 수의 조합으로 나의 언어를 분석하고
나의 행동을 분석해서 조합된 언어로 나와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이다.
문화테크노형 안드로이드는 인간의 삶 속에서 주로 아이를 돌보는
도우미형 안드로이드이기 때문에 업그레이드나 성능개선이 필요치 않다.
흑인 엄마와 백인 아빠 그리고 중국인 입양아를 둔 집에
아이의 보모역할을 위해 아빠는 안드로이드인 양을 구매한다.
양은 중국인의 형상을 하고 있다. 딸 미카가 중국인이기에
미카의 근원적 뿌리를 찾아주고 싶어서 아빠는 양을 구입했다.
딸 미카는 안드로이드 양을 사랑한다.
하지만 어느 날 양은 작동을 멈춘다. 영화는 양이 작동을 멈춘 시점으로부터
시작한다. 양은 지금까지 본 AI영화들과 다른 점이 있다.
양이 작동을 멈춘 시점부터 부패가 시작된다는 설정이다.
기계로써 폐기되는 게 아닌 부패가 시작되어
소멸된다는 사실이 감정을 건드린다.
양이 어린 미카를 케어해 주기 때문에 전적으로 양에게 모든 걸 의존했던 엄마 아빠의
일상을 올스톱이 되고 말고
그만큼 양과 깊은 관계였던 미카는 깊은 상심감에 빠진다.
가족은 양을 다시 고쳐서 쓰기로 결정한다.
영화는 아빠가 양을 고치기 위해 이곳저곳을 찾아다니면서
전개된다.
이야기 플롯을 아주 간단하다. 양을 고치기 위해 수리업자들을 찾아다니다가
우연히 양에게서 새로운 점을 발견한다. 양은 중고안드로이드였고,
미카의 집에 오기이전 긴 시간 어느 가정에서 지냈다.
보통의 안드로이드는 셋업과 동시에 기억이 사라지는데...
양의 중심부 기억을 담당하는 칩 안에서 양의 기억들이
훼손되지 않고 그대로 켜켜이 쌓여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빠는 양의 기억들을 하나씩 꺼내어 재생시킨다.
그동안 단순히 기계라고만 느껴졌던 양이라는 안드로이드의 기억들은
단순한 기계적 저장이 아니었다.
과거의 행복과 슬픔의 기억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기억돼 있었다.
양은 기억을 저장한 것이 아니라 기억을 자의적으로 품고 있는 것 같았다.
나뭇잎 사이로 들어오는 여름날의 햇살
눈물 흘리는 여인의 뒷모습
거울을 보고 있는 양 자신의 거울에 비친 모습
클럽에서 흘러나오는 노랫말
양의 기억은 감정을 담은 기억들 그 자체였다.
아빠는 결국 양의 기억들을 보며 소리 없이 운다.
자신의 기억만을 남기고
양은 결국 수리를 하지 못하고, 영원히 기능을 멈춘다.
아빠는 지금껏 자신이 가족들에게 소홀했다는 성찰을 하며 가족의 소중함을
느끼면서 영화는 끝난다.
향기 나는 차를 마시고 그 차의 맛뿐 아니라
그 차맛에서 느끼는 공기와 바람까지 생각할 수 있다는 아빠의 말에 양은 말한다.
"제게도 차가 그냥 지식이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양은 인간이 되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양은 인간들을 케어하고,
인간이 자신에게 필요한 진짜를 찾는 것을 궁금해한다.
인간의 시선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대하는 인간들에게 자신의 진짜를 찾고 싶어 한다.
어쩌면 양은 자신을 하나의 존재로 남기고 싶어 한다.
감정이 없는 ai,에게도 자신이라는 정체성이
존재하는지의 의문이 든다.
안드로이드는 인간에게서 감정이라는 것을 이해하지만 느낄 수는 없다.
양은 나비를 수집하는 걸 좋아한다.
" 애벌레에게 끝이지만
나비에게는 시작이죠"
엄마가 끝과 시작을 믿느냐는 질문에
" 모르겠어요. 그런 믿음으로 프로그램되어 있지 않아서.."
영화를 보는 내내 안드로이드 양의 얼굴이 클로즈업된다.
아름다운 화면은 가변적이며
음악은 장면 내내 물처럼 배경처럼 흐른다.
양이 얼마나 인간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집중하며
고요하고, 사려 깊게 이야기를 듣는지... 보는 내내 양이라는 아름다움에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나두 양을 갖고 싶다.
안드로이드라면 당연히 모든 것이 완벽하게
프로그래밍되어 적절 한때 말하고, 듣고, 피드백하고, 조율이 잘 될 것이다.
우리들은 대화는 얼마나 산만한가! 아무런 여백도 없이 끊임없이
요구의 수단이나 명령의 수단으로 지식의 수단으로 입밖으로 나온다.
양은 인간으로 살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 양은 무엇이 되고 싶었던 걸까?
양은 인간에게 자신들의 것을 찾는 법을 궁금해했다.
인간이 자신다울 수 있는 법을 도와주려고, 대화를 하고 데이터를 찾아 준다.
우리는 의무나 책임만 으로는 살 수없다.
행복을 찾기 위해 자유로워 지기 위해 자신의 정체성에 언제나 질문을 던진다.
양에게도 그런 자신만의 존재의 의미가 필요했을까?
오랜 주인이었던 인간들과 함께 했던 기억들을
베타. 감마. 알파에 저장해 자신의 존재를 남기고 싶었을까?
나는 나의 존재의 의미를 만들기 위해 글을 쓰고
타인들 속에서 나를 들여다본다.
그러면서 나 스스로에게도
어떤 존재가 되고 싶다.
오늘도 나를 규정하는 많은 것들이
기억속에서 감정속에서
헤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