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 충동에 시달린 적이 있었다.
은둥형 외톨이
아이들을 재우고 오븐에 머리를 넣고 자살했던 실비아 플라스의 내면을 들여다보려고 실비아 플라스의
일기라는 두꺼운 책을 정독 한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일기에서 죽음의 냄새나
우울의 그림자 같은 문구는 그닥 없었다.
오히려 그녀의 뜨거운
삶의 열정만 느껴졌다.
자살에도 선입견이 있는 건가! 연예인의 자살소식을 들으면 으레 드는 생각은 또 우울증이구나 마약 했나 보지.. 알코올중독이구나!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하지만 예술가의 자살은 좀 결이 다르게 다가온다. 반고흐의 자살이 그러하고
헤밍웨이 , 로맹가리, 가와바타 야스나리, 버지니아 울프, 전혜린, 등등 많은 작가들의 자살들이 그러하다.
작가들의 자살은 왠지 마음 한편이 무거워지면서도 마치 문학작품을 완성하듯이
낭만적인 죽음일 것 같다는 상상을 하게 되고.
자신의 재능 없음의 도피나 재능의 완성쯤으로 미화되기도 한다.
헤밍웨이 같은 강철이미지의 작가가 약물중독과 우울증으로 시달리다 자살을 했다는 건
꽤나 충격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평소 약물중독도 아니었고 우울증에 시달리지도 않았고 죽지직전까지 그 어떤 이상증세도 없었다. 아무리 현세가 싫다 해도 아무리 덕행이 높아도 자살은 깨달은 자가 할 일이 아니다고 자살을 비난했지만 자신의 별장에서 가스관을 입에 물고 자살했다.
강아지 한 마리 화초 한그루만 키워도 자살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있다.
한 생명이 나의 부재로 죽을 수도 있기에....
자살의 전조증상이 우울증이라면 우울은 이마 내 안의 우주가 사라지고 내 안의 내가 사라지고. 오직 고통만 존재하는 상태이기에 아무것에도 관심을 둘 수가 없는 상태가 된다. 아무것에도 관심이 없고 고통만 존재할 때.
고통을 끝내기 위해서 죽음으로써 나라는 존재를 찾거나 나를 잊기위해서 자살을 택하는지도 모른다. 자살할 용기가 있으면 그 힘으로 살아갈 힘도 반드시 있다는 말을 종종 한다. 하지만 자살은 이런 단순한 용기의 문제가 아니다.
자살은 유전적 요인과 어린시절 환경적 요인도 있지만 자살의 상태는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모든 감정들이
고갈된 상태가 아닐까?
더 이상 살아도 살아있는 상태가 아닐 때......삶의 한조각 의미도 찾지못할때.
자실로 스스로 종지부를 찍는다.
자살은 절대로 함부로 이야기할 수 있는 스토리가 아니다.
하지만 자살의 순간은 인간이 처음으로 택하는 가장 완전한 자신만의 이기적인 선택이다. 자신만을 생각하는 것! 자신의 완전한 의지.
결국 자살의 직전 처음으로 완전하게 자신을 긍정하면서 죽을 수 있다는 것이다.
고통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만약 맨 정신으로 자살을 결심한다면 마지막 순간
죽음을 완전하게 받아들이는 경험을 순간적으로 하게 되고 잠깐의 찰나에
평온함을 느끼게 될 때 마음의 변화가 일어나는 기적 같은 일이 생길지 모른다.
그렇다면 대부분은 자살의 상태는 술이나 약에 취해있는 상태인지 모른다.
인간의 의식이 온전히 있다면. 의식은 절대 스스로를 죽이지 않는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순간은 죽음에서 해방되기 때문에 삶의 의지를 찾게 되는 게
의식이 가진 본능이다.
약물중독애 의한 자살은 엄밀한 의미에서
자살이 아닌 약물에 의한 타살인 것이다.
위대한 작가의 자살을 보면서 , 인간의 지성이 어느 지점에 도달한다는 것과
스스로를 안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위대한 정신세계의 재능과 깨달음은 별개의 문제라는 생각도 든다.
벼는 익으면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진부한 말이 떠오른다.
자신에 대해 안다는 것은 지극히 하찮은 것들은 알게 된다는 것이다.
즉 자신에 대해 제대로 안다는 것은 자신은 결코 위대하지도 않고
특별하지도 않고 그저 강아지나 화초와 별반 다를 것 없는 생명체와 같다는
지극히 평범한 진리이다.
하지만 이런 지극히 하찮은 자신이라고 해도
위대한 그 무엇도 되고 하찮은 그 무엇도 된다는 열린 마음이
익어가는 벼를 고개 숙이게 한다.
결국 고통도 허무도 권태도 모두 하찮은 것이 된다.
그러기에 목숨을 버려서 끝을 낼만 한 것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하찮게라도 생명으로 유지하는 것이 정답인 것이다.
인간은 그렇게 조금도 특별할 것이 없다.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든다, 은둔형 외톨이와, 외향적 낙천주의자 중
누가 더 자살률이 높을까?
이런 질문은 정말 바보 같은 질문이다.
왜냐면 자살은 성향의 문제도 있지만 환경적 요인이 더 크다.
그러니까 질문은 이래야 한다.
은둔형 외통이 와 외향적 낙천주의자 중
자살에 취약한 사람은 누구일까?
외향제 낙천주의자는 환경적 요인에
취약할 수 있다. 은둔형 외톨이는 이미 환경적 요인 속에서 자신을
받아들이는 방법을 안다.
하지만 외향적 낙천주의자는 자신의 고통에 대해 무지하다.
이것은 나의 경험에서 비롯된 추론이다.
나는 외향적 낙천주의자였다. 나의 고통에 대해 얼마나 무지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큰 사고 후 힘들 때 자살을 여러 번 생각했었다.
지금은 자발적 외톨이로 살아가면서, 자살에 대한 충동은 완전히 사라졌다.
까뮈의 이방인에서 자살은 자기 삭제의 한종류라고 말했다.
자살이 한 숭고한 생의 삭제라는 말은 허무하다.
적어도, 내 생의 한순간은 마지막 꺼져가는 삶을 붙들고,
신이 나에게 준 인생이라는 무대 위의 주인공답게 인간이 가진 모든감정들의 끝을
다 느끼면서 받아들이고
아름다운 삶으로 끝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