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사랑하는 시간들에는 정성이 있다.
하나의 영화를 기다리고, 그 영화를 가장 즐겁게 보기 위해, 시간을 짠다.
아주 잠깐의 설렘이 온다.
그 영화를 기억할 때 함께 떠오르는 많은 것들이 있다.
조조를 보러 가기 전 아침 으슴푸레한 공기, 사람들의 발자국소리.
아무도 없던 텅 빈 극장 안에 들어섰을 때의 그 적막함, 혼자서 영화를 보면서
문득 무서워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휴지도 없이 영화를 보다 흐르는 눈물을
속옷에다가 연신 닦아내고, 너무 먹먹해서 극장 안을 빠져나오지 못하는 그런
시간들도 영화를 보기 전 설렘과 함께 또 다른 설렘의 흔적처럼
영화 한 장면으로 남아 있다. 그때 본 영화가 뭐였더라 생각할 때
영화는 기억이 안 나고, 친구와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던 그 카페만 선명하게
기억날 때도 있다. 음악을 좋아하면 노래만 듣는 것이 아니다.
음반을 사모으기 위해, 하루가 멀다 하고, 레코드샵을 뒤지고, 인터넷을 뒤진다.
내가 향유하는 모든 시간 속에는 내가 한때 좋아했던 그 순간들의 설렘이 있다.
음악, 영화, 드라마, 마음 맞는 사람들과의 소통, 즐거운 농담, 이 모든
행위 안의 내 마음이 머무는 바로 그 순간들의 설렘의 감정들을 모아 본다.
설렘은 새로운 것에 대한 감정이 아니다.
설렘은 내가 사랑하는 것들의 순간적인 사랑이다.
왜 오래된 것들에게서는 설렘을 자꾸 잊혀져 가는 걸까?
설렘에 대한 오해는
새로운 것들에게서 온다는 생각이다.
설렘의 감정은 어쩌면 과거의 감정의 무한 반복일 뿐이다.
왜냐하면 사고 싶은 물건을 샀을 때 새로운 사람에게서 사랑을 느낄 때
재미있는 드라마가 시작될 때
우리가 느끼는 그 설렘은 과거 갖고 싶은 물건을 샀을 때
감동 깊은 드라마를 봤을 때.. 어떤 사람과 사랑에 빠질 때의 감정과
거의 동일한 감정이다.
결국 물건이 바뀌고, 드라마만 바뀌고, 사랑하는 사람이 바뀌고,
상황만 바뀔 뿐 늘 언제나 같은 패턴의 반복이다.
단지 다른 것이 있다면 상황과 강도의 차이만이 존재할 뿐이다.
우리는 어쩌면 같은 감정의 반복을 계속하고 있으면서
이번사랑은 특별하고, 뭔가 운명적이며, 영원할 것 같은 착각을 하면서
그 설렘의 질을 오래 즐기고 싶은 건지 모른다.
이런 아름다운 감정들이 단지 호르몬의 연속일 뿐이라고, 결론지어버린다면
그 무수한 시간 울고, 웃으면 보낸 시간들이 얼마나 허무한가.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그냥 무덤덤한 감정의 소유자라면 이 모든
감정들이 그저 호르몬일 뿐이야 라고 넘어가겠지만
사랑이란 감정이 넘치는 사람에게는 그 사랑의 감정이 강열하면 할수록
그만큼 그뒤에는 고통도 허무도 크게 온다.
한 사람만을 오래 깊게 사랑할 때 그 사람을 알기 위해
긴 시간 기다리고, 눈물을 흘리고, 질투하고, 원망하고, 섭섭해하고,
기다리고, 그런 모든 시간이 사랑이라는 이름 속에 있다. 그 안에서 설렘이란
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의 또 다른 이름이다. 모든 설렘은
그 사람과의 관계 안에서 만들어진다. 설렘의 종류도 달라지고,
호르몬도 변할 것이다. 다른 이성이 눈에 안 들어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랑도 분명 존재한다. 평생 한 사람만 사랑해야 된다는 조건이 전재된
세상에서 사는 사람들은 한 사람과 끊임없이 다른 설렘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타인들과의 변화가 아닌 둘만의 변화 속에서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유라는 이름 앞에서 선택이 자유로운 사랑은
설렘의 유효기간은 하나의 사랑이 끝나갈 때가 아니라
새로운 대상이 나타나기 전까지 일 수도 있다.
지금 사랑이 아무 문제가 없고, 딱히 새롭게 끌리는 상대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쩌면 한 사람에게서 쭈욱 설레면서 살 수도 있다.
왜냐하면 설렘이란 생물학적으로 같은 감정이기 때문이다.
단지 현재가 지치고 힘들다 보니, 깊이 들여다보지 않고, 회피하려는 마음이
오래된 것들에게서 설렘을 빼앗아가고, 손쉽게 느낄 수 있는 새로움을
찾아서 더 강렬하게 원하고 있는지 모른다.
설렘은 대상이 아닌 내 안의 탐구와 창조의 영역이다. 이런 설렘이 베이스에 깔려 있지 않고,
어떤 대상이나 물건, 상황들에서 설렘을 찾고자 한다면
우리는 우울의 밑바닥만을 헤매면서 끊임없이 설렘을 찾아 공허를 찾아다니게 될지 모른다.
내 삶 속 오래된 것들에게서 찾을 수 있는 설렘은 온전히 나 자신의 삶으로부터 만들어진다.
내가 혼자 하는 다양한 것들의 시간들, 그 속에서 느낀 감정들, 사물을 보는 시선의 변화.
내 주변을 둘러싼 가족 들고, 내 벗들에게 관심을 가져서 그들은 좀 더 깊게 들여다보며 반응해 주는 것 그때도
조금 색다른 설렘 올라온다.
늘 지나치는 거리에 조금 더 애정을 갖고 들여가보면 거기에도 또 다른 설렘이 온다.
이 익숙함의 설렘이 없으면 나는 현실에서
자꾸 도망치며 다른 설렘을 갈구하게 될 것이다.
요즘 내 설렘이 그 어떤 대상으로 인해 지각변동을 일으키고 있다.
나는 이 변화가 마냥 좋지많은 않다.
이 강역한 설레임이 다른 오래된 설레임을 테러할지도 모른다.
그저 가만히 내 안에서 일어나는 호르몬 전쟁을 지켜볼
뿐이다. 이 설렘이 어떻게 확장하고, 변화할 것인지.
내 익숙한 것들의 설렘과 어떤 조화를 이루어가는지 그걸 지켜보는것도 설레임이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