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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끼 Apr 08. 2024

너를 보는 특별한 시선

특별함

"너 강아지 좋아하니?"

그녀와 조금 친해졌을 때 거리를 지나치는

앙증맞은 시츄를  무심하게 쳐다보는 그녀를 보면서 질문했다.


" 아니  난 싫어, 강아지의 그 애정을 갈구하는 까만 눈동자가 부담스러워"

그녀는 조금은 시크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녀의 이 대답은 왠지 그녀를 더 특별하게 보이게 했다.

그녀의 특별함은 세상과 사람을 보는 시선에 항상, 무관심하고,

관조적이며, 평온하고, 느린 삶의 태도였다.

함께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시간이 되면 시크하게 일어나

먼저 집으로 가버리곤 하는 그녀의 개인주의도 어쩌면 그녀만의 매력이었다.


함께 여럿이  된장찌개를 먹으러 가다가도, 갑자기 돈가스가 먹고 싶다며

나중에 찻집에서 만나자며 인사하고, 돈가스집으로 혼자 성큼 들어가는

사람이 그녀였다.  처음 만났을 때 그녀에게 적응하는 시간이 좀 걸리고,

이건 뭐지 싶은 순간이 있지만, 뭔가 진실되 보이고, 자신만의 세계가 확실해 보여

그녀에 대한 궁금증이 애정으로 변했다.


자신의 의견을 잘 드러내지 않았고, 말수가 적어서, 아무런 피드백도 없이

나 혼자 떠드는 시간이 많았지만 여백의 미처럼 느껴져서 좋았다.

하지만  어느날 그녀가  특별하지 않게 된 사건이 있었다.

여럿이 함께 차를 마시면서, 선배언니가 자기가 키우던 강아지 얘기를 하다가 그녀에게 질문을 던졌다.

" 너 강아지 좋아하니?"

이 평범하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질문은 너는 떡볶이를 좋아하니 만큼 특별하지도 않았다.

그때 그녀의 눈빛이 일순간 밝아졌다.


" 네 언니 강아지 좋아해요. 사랑스럽잖아요. 강아지 싫어하는 사람도 있어요"

그때 나는 잠시  내가 기억력이 잘못된 건가 싶었다.

 갑자기 강아지가 좋아지게 된 이유는 선배가 강아지를 좋아해서일까?

좋아하는 마음도 순간순간 변하는 그런 변덕 때문이었을까?

" 야 너 지난번에는 강아지 싫어한다고 했잖아"라는 유치한 이야기를 꺼내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것이 사람의 마음이니까....

하지만 그때부터 나에게서 그녀의 특별함은 휘발되어 사라졌다.


그녀의 내면을 성급하게 열어젖히지 않고,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던 나는

그때 이후로

아무런 자기 의견 없이 내 얘기만 경청하는 그녀에게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내 질문에 자신의 의견을 내놓지 못했다.  그저 단지 모르겠다며 힘들어했다.

나의 질문은 우리의  동질감이 이질감으로 변하고, 함께 공유하는 시간을 어색함으로 채웠다.


관계 속에서 특별하다고 믿었던 내 마음이 그녀라는 창조물을 내 안으로 들여와

차곡차곡 그녀를 쌓아 올리고 있었다.  내 안에서 그녀는 새롭게 만들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특별함이 사라지자 기둥이 무너진 자리를 버티는 하나의

건축물은 폐허가 되어 철근하나조차 세워지지 않았다.


그녀는 나에게 아무런 실수도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나에게서 그녀의 아름다운 성이 무너지고 있었다.

그녀는 단지 그녀일 뿐인데... 어쩌면 내 마음 안에 들여온 그녀는 내가 원하고, 기대하는 그녀의 모습이었다.

그녀의 특별함을 새롭게 디스플레이해서, 내가 좋아하는 요소들로 꽉꽉 채운

새로운 의미의 그녀를 나는 좋아하고 있었다.

그녀의 빈약한 사유는 과묵하고, 입이 무거운 깊이 있는 사람으로 탈바꿈하고,

자기중심적인 행동은 그녀의 자기다움으로 멋지게 포장하고,

공감능력이 1도 없는 그녀를 시크하다고 포장하고,

타인에게 관심이 1도 없는 그녀를  자기 세계가 우주만큼 깊다고 혼자 착각해서 그녀의 특별함을

내 안에서 창조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특별함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특별한 그녀를 좋아해서 내가 특별해지고 싶었는지 모른다.


신데렐라를 꿈꾸는 많은 여자들은 유리구두를 신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라

동경하는 그 어떤 사람이 자기를 좋아해 주기 때문에 자신이 특별한 사람이 되었다는

확신 때문이다.  그런 확신은 그 사랑이 떠나가면 사라지기 때문에

또다시 그런 특별함에 집착하게 만든다.

나 스스로 특별하다는 우월감을 가진 사람

 또한 마찬가지다.

자신의 특별함이 상대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변하고, 상대가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을

받을 때 그 특별한 마음을 즐기고 싶어 하는 것이지 그 사람을 특별하게 여기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특별함은 나만이 느낄 수 있는 고유의 영역이지만

나의 특별함이 상대에게서 훼손되었다고 느낄 때 어쩌면 사람들은 상처를 받거나 모욕을 느낀다.


코로나로 세상이 혼란했던 시기에 한국드라마는 전 세계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고,

K드라마만의 특별함에 대해 외신들은 하나의 신드롬처럼 새롭게 부상했다.

한국드라마에는 무언가 신선하고, 감동적이며, 따뜻하고, 서사적 줄거리가 있다는 것이었다.

K 드라마는 한국 사회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까발리고, 이런 문제는 함께 고민하는

서사를 중심축에 깔고 감정선을 따라간다.

한국 드라만이 가지는 신파적 요소와 암울한 현실 이런 우울한 정서를 K드라마는 차곡차곡 디테일하게 파고 들어가는

섬세함이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 돠 이런 한국드라마의 특별함은  이런 감동과 재미 섬세함에 있지 않다.

바로

병들어 있는 한국사회에 있다. 헬조선이라는 이야기 속에 있다. 자살률 1위 2위를 다투는

행복하지 않은 나라 속에 있다. 한국경제의 급속성장은 승자만이 살아남고, 경쟁만이 최우선인

세계에서 가장 정서가 우울한 국민을 만들었다.


병들어 있는 한국사회가 특별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을

특별하게 보고 , 그 이야기를 특별하게 써가는 특별한 시선이

전 세계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모든 인간은 자신이 특별한 존재라고 확신하면서 살아간다.

그리고 그 특별함을 인정받으려고 노력하고, 그 특별함에 기대어 살아기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특별함을 쫓을 때 인간은 병들어 간다.


유명인들의 자살이 많은 이유는 이런 특별함과 초라한 인간의 간극과 갭을 메꿀 수가 없기 때문이다.

때로는 강아지를 좋아하고, 때로는 좋아하지 않는 것,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거리낌 없이 하는 것,

똑똑해서 남들이 생각하지 않는 독특한 생각을 하는 것,  유머감각이 있어서 사람들을 즐겁게 해 주는 것,

이 모든 것이 특별함일 수는 없다.


특별함이란. 완성된 그 무엇이 아니고, 결과된 그 무엇도 아니고, 선택된 그 무엇도 아니고,

결정된 그 무엇도 아니고, 언제나 변하고, 현재진행형인 만들어지는  것들이다.

 아름답고, 행복하고, 즐겁고, 연약하고, 결핍되고,  상처받고 보잘것없는 모든 것들을 바라보는

  시선과 해석들이다.


그 어떤 사람을 특별하게 생각하기보다는 상대를 보는 나의 시선을 특별하게 만들어야 한다.


우리가 관계 속에서 함께 만들어나가는 이야기들은 서로의 특별한 사람이 만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결점들을 바라봐 주는 특별한 시선들이다.


내가 이런 특별한 시선을 가지고 바라봐 준다면 그 어떤 한 사람을

이런 사람이라고 규정해버리고 마는 그런 오류는 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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