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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끼 Dec 07. 2018

내 탓이오!

나의 탓이요!

당신은 아무 일 없던 사람보다 강합니다.라는 책 제목이  있다.

그중 난 아무 일 없던 사람 중 한 명이었다.

 한 번의 삐걱거리는 인간관계도 없었다.

매사에 조심하고 신중하고, 모험은 하지 않고, 문제를 만들지 않기 위해. 크게 손해 나지 않으면 사람들에게 맞추고.

나를 주장하지 않았기에, 늘  언제나 곁에는 사람들이 있었고,

온유한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며 살았다.  언제나 성실했고 노력했기에, 완벽하지는 않아도, 어느 자리에서도 밀려 나는 일은 없었다.

스트레스가 생기거나

어떤 문제가 생겨도 내가 못나서 그러지 뭐

"내 탓이요" 한번 외치고 나면 멀쩡하게 마음이 가라앉았다.

"내 탓이요"이요 만큼 강한 마법은 없었다.

물론 대부분의 문제들은 내 탓이 아닌 것들이 많았었다.

그것들과 맞서 싸우기에는 나의 능력이 미치지 못했기에 쉽게 타협하고 포기했다.

끈기가 부족했고 못된 년이 되기가 싫었고, 변화되지 않는다는 걸 알았기에

가장 손쉬운 법이 내 탓이요 하면서 문제들을 피해 나갔었다.

관계 속에서 사건 속에서 마치 모든 문제들을 혼자 감내하면서 살고 있는 듯

어느 순간에는

희생이라는 단어를 갖다 붙이면서

나에게는 소홀하고 엄격하면서

타인들에게는 관대했다.


하지만 내 탓이요 라는 결코

 내 탓이 아닌 단어 속에 엄청난 함정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 순간 자신에게 재앙이 닥치는 바로 그 순간이다.  스스로 감당하기 힘든

사고나  상실의 고통을 당했을 때,

이젠 정말 내 탓이 돼버렸을 때  왜 그날   난 왜 그곳에 갔을까?  왜 그 일을 꼭 내가 했어야 했을까?

아 모든 게 꿈이었으면.... 이건 현실이 아니야!

그때  아무도 나의 고통을 대신하지 못한다.

내가 왜 정신력이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건가! 끊임없는 내 탓은   고독하게 나와의 싸움을 걸었고

 모든 걸 내 탓으로 차곡차곡 쌓아 두었던

저주의 망령들이 살아나서 나를 괴롭히기 시작한다.

몸과 마음이 건강할 때의 " 탓이요"는 나의 든든한 안식처 역할을 했지만

벼랑 끝에 몰린 나의 내 탓 이요는

다른 이들의 모든 허물까지 껴안았던

수많은 자아가 나를 공격하기 시작한다. 누구를 위한 내 탓이었는가?


잠재돼 어있던 억울함이 분노로 고통으로 슬픔으로 폭발하면서, 타인들이에게 모두 이방인처럼 냉담해지기 시작한다.

 그때의 나에게는  비상구가 없어진다.

 탓이요 라는 말은 건강한 자아를 만드는데.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래도 꼭 써야 한다면. 내 탓의 본질을 정확히 알고 사용해야 한다.

내 탓이요란. 내가 잘못한 무언가가 아니라,

내가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그 무엇이다.

나의 포기가 아니라 , 나의 허용이다.

  타인의 허물 만이 아닌 나의 허물도 수용하는 것이다.  

모든 불합리성을 변형시켜 다름을 안아주는 것이다.

이럴 때 내 탓이요 는 건강하게

마음에 안착하게 된다.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불행은 내 탓이 아니다.

사회의 제도적 모순 탓이 제일 크고.

그 누구의 탓도 될 수 있고

세상 전체의 탓도 될  수 있고

우주의 탓이 될 수도 있다.


누군가 나를 향해 화내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그의 탓이다.

나를 향한화살을 반사해서

그 사람만을 보자. 화가 나서 자신의 감정을 주체 못 하는 사람을 다독이자.

누군가 나 때문에 모든 걸 망쳤다고 원망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를 보지 말고 그 사람을 만을 보며 위로하자.

내 탓이 그 사람에게 위안이 될 리도

나에게  위안이 될 수도 없다.

  

내 탓이 있다면 너무나 나 다웠었던것

나 자신이었던 것

그것이 내 탓이다.

그때 얼마든지 내 탓이어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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