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가장 큰 로망이 사랑이었던 청춘. 사랑에 목숨도 걸만큼 절대적이었지만,
다행히도 내 곁에는 마음의 지주 같은 든든한 친구가 둘씩이나 있었다.
폭풍같이 찾아온 나의 유일한 사랑이 나를 지치고 힘들게 하면서 끝이 났을 때
그 쓰나미 같은 이별의 아픔을 견디어 낼 수 있었던 건 아마도 친구들 덕분이었다.
그들이 딱히 나에게 무엇을 해준 건 없지만 내 마음의 주춧돌처럼 든든하게
지지해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내 청춘사에서 한 번의 연애사가 비장하게
끝났음에도 아무런 타격이 없었던 건, 사랑했던 이가 빠져나간 자리에도
내가 아끼고 사랑하는 친구들의 자리가 컸기 때문이다.
사랑에 올인해서 모든 걸 다 주었지만 실연당했을 때, 상실의 아픔을 크게 겪지 않는
사람은 사랑을 받는 것보다는 하는 것을 할 줄 아는 사람이다.
또한 자신의 내면을 이해해 주는 사람이 곁에 있어 이해받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아무리 힘든 일을 겪는다고 해도 내 안에 누군가을 사랑하는 마음이
남아 있다면, 그 마음으로 버티어 낼 수 있다.
예전에 친구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 난 그때 그 사람과 헤어지고 내 삶의 끈을 놓아버리고 말았어.
너를 조금만 더 일찍 만났다면 아마 난 그 사람과 헤어졌어도 내가 그렇게 망가지지는
않았을지 몰라."
이 말에 고맙기도 하고, 뭔가 존재감이 업되는 그런 느낌을 받았지만
내 속마음은 조금은 냉정하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글쎄 그렇지 않았을걸. 넌 사랑이라는 걸 잘 몰랐을 거야. 사랑의 배타적 독점
소유권에 취해 있다 보면, 사람을 소유하는데 급급 했을 테니까. 친구도, 사랑도
소유하다 보면, 내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집착으로 변질되거든. 집착은 상실의
아픔을 겪으면 자기 파괴로 이어지니까.
그러니까 나를 이해받는다는 건 그런 스스로의 집착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소유하려는 그런 마음을 인정하고, 조금은 자유로워지는 거겠지.
우리가 서로 내면을 이야기하면서 어쩌면 너는 그런 스스로를 조금은 받아들이고,
이제는 사랑하는 법이 조금씩 변했기 때문인지 몰라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되지만, 이제는 소유할 수 없다는 걸 깨닫게 된 거지."
우리가 타인을 소유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고, 내가 유일하게 소유할 수 있는 건
나의 마음뿐이라는 거.
타인들로부터 받는 사랑은 아무리 많고, 지극하다고 해도, 그것이
내 삶을 행복하게 해 줄 수는 없었다. 연예인들이 팬들의 사랑을 아무리 많이 받아도
내가 그들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공허할 뿐인 것처럼,
마음 안에 단 하나의 사랑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죽음을 생각하기도 한다.
누군가의 사랑이 끝나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많이 남아 있다.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는다면 우리는 살아갈 수 있고, 행복할 수 있다.
그것이 사람이든 동물이든, 일이든, 인류애이든, 예술이든 신이든 그 어떤 대상이라도 괜찮다.
아무도 사랑할 수 없다면, 아무것도 사랑할 수 없다면, 나 자신이라도 사랑하면 된다.
그렇게 사랑이라는 걸 조금씩 배우고, 그 사랑을 서로 나누어 받으면
육체의 쾌락을 동반하지 않는 사랑이라도,
충분히 영혼을 어뤄만져 주고, 안식처가 될 수 있다.
아침에 겨울인데도 푸른 잎사귀가 쑥쑥 자라는 화초에 물을 주면서 속삭인다.
"너는 내가 아무런 수고를 하지 않고, 이렇게 물만 주는데도, 내 사랑으로 이렇게
파릇파릇하구나. 내가 게을러서 말려 죽인다고 해도 원망하지 않겠지.
너는 나에게서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구나, 나는
그저 너라는 존재에게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나는 너를 사랑한다
하고 있구나. 너는 그저 화초로써 존재할 뿐인데... 나에게 사랑을 바라지도 않는데..."
하지만 너에게 물을 주기 위해서, 내일도 난 살아 있을 거야.
네가 봄에 꽃을 피우는 그런 어메이징 한 일을 조금은 기대하면서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