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작가의 죽음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의 베스터셀러 작가 백세희 씨가 장기기증으로 소중한 생명을 살리고
사망했다는 사실을 얼마전 알게 됐다.
공식적 사망이유는 유족 측이 밣히지 않았다. 언론도 추측성 기사조차 입을 닫는 이유는
우울증을 극복한 베스터셀러 작가의 죽음이라 그녀의 사인이 만약 자살이라면
사회적 파장이 크게 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 아닐까 하는 조심스러운 생각이 든다.
유명인의 죽음은 늘 자살과 연관 지어져 많은 추측성 기사들이 난무한다.
한 개인의 인생이 자살이라는 죽음 앞에 너무 쉽게 난도질당하는 건 가슴 아픈 일이었다.
자살 너머의 삶을 보지 않고, 죽음이라는 결론으로 아름다운 인생이 훼손되어 슬픔으로
전해져 왔었다.
하지만 나 또한 그러한 진실뒤로 나만의 추측성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녀의 인생을 이해하고, 그 내면을 공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 평범한 인간이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으로 책을 내고, 갑자기 스타작가가 되는 성공을 거두고,
넘쳐나는 관심과 격려 사랑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었을지 짐작이 가고, 어떤 시간을 보냈을지
느낄 수가 있다. 우울증을 겪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격려와 조언을 바라는 일들이 일상이 되었을 것이다.
한 평범한 인간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엄청난 일들이 벌어졌을 것이다.
두 달 전 지독한 불면증에 걸린 지인을 도와주려고 상담 같은 대화들을 했다가
그동안 잠잠했던 불면증이 재발되었다. 심하지는 않았지만, 불면증이 사라졌다고, 믿었던 마음에
너무 큰 데미지가 생겨서 보통 하루 이틀이면 해결되었던 불편함이 몇 달째 이어지는 경험을 하면서
많은 깨달음이 있었다. 전문 상담가도 아닌 내가 지인을 상담할 때 나는 마치 내가 모든 고통을 극복한 듯한 그런 착각에 빠졌다.
이런 방법을 쓰면 된다느니, 이런 마음공부를 하면 된다느니. 미주알고주알 얼마나 떠들어 댔는지 모른다.
물론 진심으로 지인이 불면증이 완화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내가 가진 모든 경험과 비법을 전수해 주고 싶었다. " 어떻게 약을 먹지않고 불면증을 버틸 수 있어?"
라는 질문을 받으면, 약이라는 선택지가 없으면 몸은 또 스스로 살길을 찾기 마련이다라는 말을
했었다.
지인은 약을 먹는데도 두달가까이 심해지기만 했다. 이 일은 나의 두려움을 깨우는 결과가 되고 그녀의 불면증이 완화되지 않고
더 심해지게 되자 과도함 공감이 나에게 독이 되고 말았다.
결국 나도 같이 잠을 못 자는 일이 벌어지면서, 스스로를 자책하는 일이 벌어졌다.
마음의 패턴을 너무나 잘 알고 있으면서도 경계하지 못했다.
나도 온전치 못하면서 누구를 가르치려 들었을까 하는 자책감은 학습된 무한반복으로
나타났다.
나도 너와 똑같은 고통을 지금도 겪고 있다는 말이 더 큰 위로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했던 위로는 달랐다. 많은 말들을 쏟아내고 있었고, 이겨낸 자의 우월감이 깔려 있었다.
나는 너와 똑같은 고통을 겪었지만 지금은 괜찮아졌어, 너도 나처럼 될 수 있어,
라면서, 희망고문을 재촉했다. 그리고 마음 한 구석에서 스스로 안도했다.
그때 두려움이 화려한 부활을 준비하고 있었다.
운디드 힐러라는 말이 있다.
상처받은 자가 상처 입은 자를 치유할 수 있다는 말이다.
상처받은 치유자가 다른 이를 치유할 수 있는 이유는 나도 당신과 똑같은 고통을 당했고
그 고통을 알고 있으며, 그 고통을 공감할 수 있고, 그 고통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착각하는 부분이 있다. 정신적인 고통은 끝이 없다.
계속 친구처럼 함께 간다. 치유자는 고통 속에 함께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일반인들은
고통에서 치유되고 더 이상 고통이 없는 사람으로 오인하기도 한다.
강연을 하고 책을 쓰고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할 수 있는 사람은 고통을 극복한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대중이 그런 사람들에게 거는 기대는 고통을 견디는 시간이 아니라, 고통을 극복하는 힘을 원한다.
고통은 완화되는 것이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을 때 마치 다시는 고통이
찾아오지 않을 것 같은 착각에 빠질 수 있고, 이제 완전히 치유되었다는 믿음을 가질 때
마음은 우월감을 가진다. 마치 내가 선택받은 사람이고, 내가 강해졌고, 특별한 치유능력을 가졌다는 착각을 하게 된다.
대중은 운디드 힐러에게 고통을 극복한 영웅이기를 기대한다. 자신의 고통도 극복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가르치려 드는 것에 조롱을 보내고, 의심을 하고, 비판을 하려 든다.
결국 운디드 힐러는 가면을 쓰고, 대중 앞에 설 수밖에 없다. 상처받은 치유자는 이제 고통받는 가짜 치유자가 된다.
차라리 유명해지지 않았다면, 작가가 되어도 몇 권 안 팔리고 조용히 자신만의 이야기로 끝났더라면, 그녀는
아직도 자신의 고통을 벗 삼아 글을 쓰면서, 무너지고 일어서고 무너지기를 반복하면서, 아주 조금씩
고통에서 성장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의 관심과 격려는 인정욕구를 불러일으킨다. 한번 맛본 쾌감은 중독성이 강하다.
한 번의 짜릿함만으로도 중독된다. 이런 중독은 서서히 자신을 잃게 되는 과정이 되기도 한다.
그때 마음은 현재의 고통을 인정하지 않고 부정한다. 지금의 평온에 집착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현재의 고통이 없는 상태를 원하고, 앞으로도 쭈욱 그 고통이 없기를 바란다.
그녀는 고통을 극복한 사람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 빛나고 있는 사람이다.
고통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지금도 고통받고 있는 사람이다. 그녀는 지금도 죽고 싶다. 오늘 그 어떤 마음의 이정표 때문에
잠시 마음이 괜찮아져서 그 이정표를 따라갔는데, 어느 날 참담하게 무너져 그 길에서 길을 잃을 때
그 이정표는 틀린 것이 아니라, 잠시 길을 밝혀 준 것이고, 또 다른 이정표를 만들면 된다.
모든 이정표는 정답도 없고, 오답도 아니다. 계속 돌고 돈다. 오늘은 맞고 내일은 틀리다.
그 이정표에 반응하는 내 마음이 흔들리고 있을 뿐이다.
그 흔들리는 마음이 늘 정답인데, 어느 날은 모든 것이 다 틀리고, 나 자신조차도 틀린 것만 같아
길을 잃는다.
자신을 치유한다는 말은 고통이 없어진다는 뜻이 아니다. 고통 속에서 자신의 행복을 지키는 사람이다.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고, 떡볶이가 맛있는 사람이다.
" 야 떡볶이가 먹고 싶은 건 죽고 싶은 게 아냐?라고 그녀에게 말했던 사람들은
그녀가 먹고 싶은 떡볶이의 맛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떡볶이를 먹고 있는 순간만큼은 행복하고, 떡볶이를 먹고 싶은 생각이 드는 순간만큼은
행복하고, 떡볶이 생각이 나지 않는 시간은 고통 속에서 헤매고 있는 시간들이다.
나는 언제나 고통 속에서 새로운 나를 발견하는 기쁨을 누린다.
늘 새로운 이정표를 만들고, 또 허물고, 하지만 또 과거의 이정표를 다시 만들어 그 길들 다시 걷기도 한다.
이제 누군가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을 만나면, 쓸데없는 그런 조언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저 가만히 그 고통을 함께 느껴주고 손잡아 주기만 할 것이다.
그녀가 질문한다.
" 이 고통을 없앨 수는 없나요? 아프기 전 그때로 돌아가고 싶어요. 아니면 조금이라도 나아졌으면 좋겠어요."
만약에 꼭 무언가 말해 야 한다면,
"지금 그 고통 속에서도 행복은 있어요. 즐거움은 있어요. 평온함은 있어요.
그 작은 것을 잡으세요. 그러다 익숙해질 겁니다. 고통은 없어지는 게 아니라 익숙해져서 받아들여져 가는 겁니다.
몸이 해야 할 것이 있다면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마음이 해야 할 일입니다. 그 고통을 해석하는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야 합니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아니라 자신만을 위해 일어난 일이니까요. 이 엄청난 일은 재앙이 아니라, 배움이고, 선물이고, 미션이고, 성숙이며 사랑이라는 사실입니다. 내가 성장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
고통과 불안 우울로 글을 쓰는 사람들은 그 감정들이 있어야 살아갈 수 있고, 계속 글을 쓸 수 있다.
운디드 힐러 진정한 치유자는 지금도 고통 속에서 헤매고 있는 사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