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이야기들

때로는

by 토끼

어떤 이야기들은 마음이 아프다.


너의 이야기를 한번 해 줄래! 그녀와 함께 차를 마시며 조용히 그녀를 한번 채근해 보았다. 이렇게 그녀에게 편하게 말을 꺼내기까지 꽤 긴 시간이 필요했다.


많은 시간 같이 지내도 늘 혼자서만 자신의 시간을 보내면서 잘 말을 썩지 않는 그녀였다. 가끔 잠깐이라도 얼굴 보며 함께 하는 시간에도 그녀는 일 이야기 이외에는 그 어떤 사적인 이야기도 꺼내지 않는다. 내가 일방적으로 수다를 떨다 자리를 일어날 뿐 그녀는 나의 수다에 피드백이 전혀 없다. 의사표현이 필요한 순간에도 그녀는 그저 다수에 묻혀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게 좋으면 그렇게 하세요. 모두가 원하면

저도 하는 걸로 할게요. "그녀가 자주 쓰는 말이다. 그녀에게 일 이외의 어떤 일에 자꾸 말을 시키는 것은 바닷가 갯벌에서 게를 건드리는 것과 같아서 그녀는 점점 자기 구멍 속으로 숨기만 할 뿐 나오지 않았다.

그러던 그녀가 최근 들어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싱거운 농담도 한 마디씩 던지고

단톡 방에 시시껄렁한 이야기도 하면서 조금씩 사람들 속으로 파고들어 자신을 드러내 보이는 시도를 시작했다.


어느 화창한 이른봄날 그녀와 차를 마시며

"너의 이야기를 한번 해봐" 커피 향을 그윽하게 깔고 자연스레 그녀 속으로 쑤욱 들어가 보았다.

"뭐가 그렇게 알고 싶으세요.?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이야기들이에요.

상담할 때 지겹게도 했고요. 겨우 잊었다 싶으면 또 생각나고. 이제는 뭐 특별한 이야기도 아니지만...."

나는 그녀의 눈을 마주 보며 긴 호흡을 하며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내가 생각하는 너의 이야기는 지금 이 찻잔처럼 커피가 담긴 따스하고 온기 있는 한 순간의 마음 같은 이야기야! 너의 살아온 이야기가 일수도 있지만, 너의 순간순간의

너 이야기! 이 순간 속에서 꼭 놓치고 싶지 않은 우리들의 마음 이야기.

소소하고 거창하지 않은 이야기들! 넌 그런 이야기들을 한 번도 하는 걸 본 적이 없었어 난 그게 알고 싶었어. 난 네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궁금하지 않아 지금 네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게 궁금해?"

그녀는 그 순간에도 뭔가 자신의 어떤 부분을 들키지나 않은 걸까. 하는 생각으로 흔들리는 눈빛으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녀는 새로운 환경 새로운 사람들과 적응할 때마다 또 그렇게 힘든 이야기 속에서 입을 봉하고 자신을 보호하고 있었다.

자신의 입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나면 또 과거의 악몽 같은 기억이 스스로를 괴롭힐까 봐서..... 그녀를 힘들었던 시간은 혼자만의 세상 안에서

아직도 생생하게 재연되고 있는 듯했다. 아직은 입 밖으로 꺼내는 게 득 보다 실이 되는 아픈 시간 인지도 몰랐다.


어떤 불행한 과거나 불행한 경험을 겪고 난 이후에 우리의 삶이 유지되려면 어느 시기가 오면. 나만의 이야기로 자리 잡아야 한다. 과거의 힘든 상황의 생생한 다큐보다는 나만의 스토리로 각색되어져야 한다. 그래야 지만 이야기와 사건의 피해자가 아닌 승자가 될 수 있다.

모든 슬픔을 글로 쓰거나 이야기로 만들 수 있다면 우리는 그 고통을 참을 수 있다.

이야기는 견디기 힘든 사건의 의미를 드러내 준다. 사건을 겪고 있을 때는 그것의 의미를 알 수가 없다. 이야기는 그래서 우리를 새롭게 살아가게 한다.


나의 이야기는 때로는 바람에 스치고 지나가는 이 순간의 마음의 흐름이다.

왠지 스산한 마음이 들면 그 스산함이 나의 이야기이고,

따스한 훈풍이 불면 가슴 저미게 행복해지는 순간이 나의 이야기이다.

그런 사소한 것들 모두가 나의 이야기가 되기 까지.

우리는 마음속에 웅크리고 있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모든 이야기들을 꺼내서

새롭게 각색해서 내 인생 앞에 객관적인 공연으로 재현해보아야 한다.

그 공연 앞에서 혼신의 연기를 하는 나를 보며 미소 지을 수 있을 때 원망하던 사람에게서 자유로울 수 있고,

나의 진짜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다. 그때 비로소 찻잔에 스며드는 온기가

나의 한 순간이 된다.


어떤 사람을 만나서

나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그럴 때 멋진 순간의 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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