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를 안다는 건 비워지고 느려지는 일이다.
컨텍트
당신 인생 이야기.
영화 컨텍트
영화를 먼저 보고 나중에 소설을 읽었다.
먼저 감탄사가 터진다. 영화는 소설적 진지함과 재미 상상력 모든 걸 충족시킨다. 각색의 힘은 대단하다.
소설 속 흥미로운 스토리라인을 지키면서 기막힌 반전까지 끼워 넣으면서 영화적 재미를 가미했다.
소설의 독창적 언어체계 설명에는 테드 창이라는 작가를 존경스럽게 한다.
그 어느 작가에서도 나올 수 없는 물리학자의 머리에서 나올법한 이야기며 문장들이다. 신선하고 간결하다.
언어체계가 바뀌면 물리 체계도 바뀐다.
"당신 인생의 이야기"라는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그러면 우리의 언어체계가 바뀌면 뇌의 체계도 혹 바뀌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 속에 빠져들게 한다.
지금까지 외계 생명체를 다룬 영화나 소설들은
폭력적이고 비극적이고 희극적이거나 동화적이었다.
결국 인간의 휴머니즘으로 외계인을 몰아내고
지구는 평화를 지킨다. 인간은 그래도 위대하다.
뭐 그런 결말!
하지만 이 소설은 그렇지 않다.
지구 궤도상에 인공위성이 이유 없이 나타나고 침묵만 지키고 있다.
언어소통도 안되고 목적도 이유도 알 수 없다.
비행체가 공격 의사가 없음을 확인되자 전 세계는 소통을 시작하기 위해 언어학자들이
투입된다.
도대체 외계인이 어떻게 생겨먹었지! 에어리언 같지는 않을 테고.
알고 봤더니 식물처럼 생기거나 나무처럼 생겨먹은 건 아닐까?
소설 속 외계인의 모습을 영화에서 너무나 멋지게 표현한다.
또 언어의 영상적 그림은 상상했던 것보다 아름답다.
도대체 외계인이 지구에 온 목적이 뭐란 말인가!
어쩌면 그건 영화를 보는 내내 가장 궁금하고 책을 읽는 내내 의문이다.
외계인의 말을 처음들은 루이자는 강아지가 비에 젖어 몸을 터는 소리 같다고 표현한다. 퍼드득. 퍼드득. 거대한 문어 같은 외계인은 연신 퍼더덕 거리지만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다.
내가 궁금한 건 그들과 어떻게 소통하느냐?
우리의 두 주인공 언어학자 루이스와 물리학자인 이안이 피나는 노력 끝에 언어를
습득하게 된다. 마치 아이가 말을 배우듯이 외계인과
알파벳으로 몸짓으로 헵타이트 언어를 해석한다. 그들은 단지 그들의 언어를 계속 가르친다.
소통을 위한 과정을 들여다보는 과정이 소설과 영화에서 가장 흥미롭다.
헵타이트 문자는 그래픽 디자안의 집합체처럼 보여서 문자를 읽는 사람이 메시지 전체의 문맥을 미리 알고 있어야 하는 원시적인 기호 시스템을 연상한다. 표음문자인 우리의 언어체계가 아니라 헵타이트언어는 한단 어안에 마치 동사 주어 시간의 개념까지 들어있어 그들의 언어를 알고 나면 시간을 회전하는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을 떠오르게 한다. 마치 그들의 언어는 우리에게 3000년이라는 시간이 그들에게는 30일이 될 수도 있는 제약이 없는 시간 개념을 안겨준다.
소설에서는 정부는 외계인의 목적을 알려고 하고 그들이 지구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질문하지만 외계인은 단지
관찰하려는 것뿐이라고 대답한다. 영화에서는 3000년 후의 우리를 지키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그러기 위해서 무기를 주겠다고 하지만 준다는 무기는 없고 언어가 곧 무기라는 엉뚱한 대답만 한다.
미래를 예측한다는 말은 쓰지만 미래를 기억한다는 말의
표현은 좀 이상하다. 이 소설은 외계인의 언어인 헵타포드어를
배우고 나서 주인공이 미래의 기억을 찾게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우리의 뇌는 원래 초능력적인 본질을 가지고 있다는 걸 의미한다.
언어를 배우고 나서 미래를 알게 되는 초능력이 생긴다니..... 흥미롭다.
외계 생명체는 우리가 사용하는 표어문자나 표음문자와는
전혀 다른 언어체계를 가지고 있다.
과학의 언어는 수학이며 세계의 모든 현상은 물리학으로
정리할 수 있다. 만약 소설에 등장하는 헵타 포드가 구사하는 언어체계를
우리가 배워서 사용한다면 모든 사람이 머리 싸매고 공부하지 않아도 물리학의 모든 법칙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헵타 포드의 언어는 둥근 구로 표현되고 마치 우주와 언어가 연결되며
시간과 미래가 연결되고
우주와 우주 미래를 알아버린 현재의 삶이 과거로 연결되는 컨텍트라는 제목 같다.
우주는 한 방향으로 흐르고 시간이 없듯이 어디로 연결되어 흐를지 모른다.
언어는 대화와 소통이다.
고전적 일화가 있다
1770년 제임스 쿡 선장이 오스트리아 퀸즐랜드 해안에 좌초했을 때
원주민과 마주친다. 쿡 선장이 어떤 동물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 동물의 이름은 무엇인가?
원주민 한 명이 대답했다. "캥거루"이때부터 사람들은 호주에 껑충껑충 뛰어 다니는
동물을 캥거루라고 불렀다.
사실 그때 원주민이 한 말의 뜻은 금방 무슨 말이야 라는 "모르겠다"였다고 한다.
많은 언어가 포함하는 의미들..... 외계인에게 우리의 언어를 가르치고 그들의 언어를 배우는 과정에서 우리가 쓰는 언어의 한계성. 모호한 관념적 한계성.
언어의 아름다움과 폭력성. 햅 타이트 언어에는 한글자 안에서 모든 걸 내포하는 의미를 포함한다. 한 글자의 언어 안에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직관적 의미까지 담고 있어
그 언어를 이해함으로써 사고체계가 바뀐다는 작가의 상상이 마치 과학적으로 신빙성이 있기까지 했다. 즉 우리가 알고 있는 표지판들을 예로 들면 임산부석의 그림을 보면 우리는 직관으로 그 뜻을 이해함과 동시에 여러 생각 들을 하게 된다.
헵타이트언어는 그 보다 한층 업그레이드된 뜻들을 안고 있다고 나는 이해했다.
언어와 문자가 있기에 인간이 진화했고 달까지 우주선을 보내는 기적을 이루어냈다.
하지만 인류문명은 발전했지만 인간의 뇌는 진화 속도에 따라갈 만큼 진화하지는 않았다,
언어체계가 바뀌면 사고의 능력도 바뀌고 완전히 새로운
사고를 할 수가 있다는 것인가? 새로운 언어체계를 쓴다면 우리의 뇌도 새롭게 진화할까? 정서적인 면에서도 인간이 훨씬 더 창의적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우리의 언어는 문학이라는 장르에만 국한되어서 변화하고 있지만 실생활에서 그다지 변화된 것이 없다. 국가나 사회권력은 인간의 표현을 제한하고 체제에만 이용하려 한다. 인간은 공동체 안에서도 표현의 자유를 구속당한다.
창의적 생각이 집단의 이익을 대변하는 용도로만 쓰이고 한 개인의 개별적인 개성은 사회 속에서 말살되고 뒷전으로 밀려나면서 자유로운 표현은 묵살된다. 억압된 욕망은 욕의 형태를 띠면서 언어의 배설로 점점 발전된다.
좀 더 자극적인 말을 쓰면 강해 보이는 거라 생각하고 청소년들은 집단 동질의식을 욕의 형태로 점전 변화시킨다. 언어는 그저 일상생활의 회화 수준으로만 퇴보되고 있다.
언어의 문학적 표현을 문학안에서먄 국한시키고 더 이상 언어를 향유하지 않는다.
그래서 시인들이나 인문학자들은 자신을 표현하라고 외친다. 우리는 다양한 언어들과
표현하는 법을 배우고 써야 한다. 그래야 기계문명의 진화보다 더 인간적인 진화를 할 수 있다.
현대의 언어는 여유를 잃었다. 경쟁사회의 언어는 의미 전달의 속도만을 중시한다.
가령 아침에 굿모닝이라고 인사를 하려다가.
시인의 언어처럼 하늘이 열리고 바람이 춤을 추네"라고
인사한다면.... 어떨까. 좀 더 느리게 우리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 아마도 인디언들은 이런 인사를 나누었을 것 같다.
당신은 햇살의 뜨거움보다 더 지독하군!이라고 욕을 할까?
그렇다면 싸움이라는 건 어떻게 할까? 우리 모두 시인이 된다면 세상은 어떻게
변할까! 언어가 인간을 치유하고 인간을 평화롭게 만들까?
언어의 폭려이 사라지고 나면, 우리는
말없이 바라보면서 눈싸움을 하게 될까?
언어 안에서 사랑은
더 깊어지고 평화로운 세상이 오게 될까?
외계 언어의 영감으로 미래에 자신에게 닥칠 비극적 운명을 알고서도
루이스는 기꺼이 현재의 남자를 사랑한다. 아이를 잃고 아이아버지도 떠날 걸 알면서.
환희의 극치를 향해 가기도 하고 고통의 극치를 행해서 가기도 한다.
미래를 알면서도 현재를 받아들인다.
미래를 바꾸려 하지 않고 현재의 존재를 받아들이고 사랑한다.
나의 미래에 확실한 것 하나는 죽는다는 사실이고.
나는 죽을 때까지 행복하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고
많은 아름다운 것들을 사랑하고 표현하고 사회의 부조리를 비판하고
많은 글들을 쓰면서 나를 표현하고
나의 , 존재를 스스로에게 증명해 보이며 현재를 살 것이다.
언어와 문자는 그래서 인간을 더욱 인간답게 만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