뫼비우스의 띠

과거의 족쇄

by 시골남자

오랜만에 모교에 다녀왔다.

젊은 날의 청춘을 떠올리며 강의를 들으려 다녔던 건물 복도를 천천히 걸었다. 건물 외부는 변한 것이 하나도 없다. 강의실과 내부 인테리어가 조금 바뀐 것 같지만 위화감은 없었다. 복도를 걷다 유리에 반사된 내 모습을 우연히 보며 나만 변했구나 생각했다.

옛 기억이 떠오르면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것이 흐릿해 보였고, 내 앞에 펼쳐진 사물에 과거의 옷을 입히며 상상에 잠겨보기도 했다.


난 항상 궁금했다.

왜 이렇게 그때, 특히 학교라는 장소가 그랬는데,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걸까. 최선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인가? 그래서 후회하고 있는 건가? 생각 끝에는 항상 더 잘할 수 있었는데, 하는 의문이 떠올랐다. 그렇지만 과연 그때로 돌아간다고 최선을 다할까? 솔직히 잘 모르겠다.

향수에 젖어 생각에 잠기면 과거의 기억은 자연스레 떠오른다. 좋지 않은 기억들이. 상처, 실수, 아쉬운 선택, 미루다 미처 이루지 못한 일, 무지해서 방황했던 시간들. 정확하게 기억은 못하지만 이따금씩 기억나는 것만 따져봐도 안 좋은 기억이 더 많다.


학업이 주(主)였을 때 나는 오히려 다른 곳에 관심이 많았다. 열정을 쏟아부었나 생각하면 만족할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처음에만 반짝하고 꺼지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 흐름의 끊어짐은 대개 지속성이 없어서였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 동기가 내면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남보기 멋져 보이는, 있어 보이는 것을 배우려 했다. 그리고 그런 것을 좋아한다고 착각했다. 좋아하는 것에 올인할 자신도 없으면서 그저 남이 볼 때 괜찮아 보이니까 나도 그런 걸 좋아한다고 최면을 걸고 그 길을 걷고 있는 척했다. 어떤 것을 좋아하고 원하는지도 모르면서 말이다. 머저리 같으니.


어느 길이 후회가 없을까를 생각하기보다

어느 길이 더 안전한가를 무의식적으로 지향했다.

내 인생을 걸고 위험을 감수해 볼 생각은 하지 않고, 학업도 적당히, 관심 있고 하고 싶은 것도 적당히 했으니, 이도 저도 아닌 그런 수준, 수심은 얕은데 호수는 넓은 꼴에 머무르게 된 걸지도. 조금 해보다가 아니다 싶으면 방향을 바꿔 이것저것 손을 댔다. 그리고 이를 진로탐색이라 포장했다. 하지만 그 탐색은 내겐 돈을 지불하고 한 두 번 경험해 보는 단순한 체험 같은 것이었고, 그런 식의 경험은 오롯이 내 것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마음이 가는 것은 음악과 미술 그리고 운동이었다. 하지만 나는 안전하다 여겨지는, 남들 대부분이 걷는 길을 따라 걸었다. 좋아했고 관심 있던 분야에는 등을 돌렸다.

"운동선수는 성공하기 힘들어, 예술은 배고파, 음악 하면 먹고살 수 없어"라며 학교 선생님들로부터 들은 몇 마디는 나만의 기준이 자리하기 전, 내 생각에 침입해 인생일대 중요한 결정을 앞둔 순간에서 결정타로 작용했을 것이다. 남 말 새겨듣지 말고, 내 안의 소리에 집중해야 했는데 말이다.


여하튼 나는 예술 쪽에 관심이 많았는데,

도대체 왜 학업에 미련이 남는 걸까?

그건 아직도 모르겠다.

열심히 공부하지 않던 전공서적을 다시 읽어보기도 하고, 관심이 있던 분야를 재탐색하며 그 시기에 '잘'보내지 못한 시간을 바로잡아보려고 시도도 해봤다. 그런데 뭔가 아니다 싶어 그만뒀다. 10년도 더 지난 시점에 그때 배웠던 것을 다시 공부한다 한들 무슨 보상이 있으며, 누가 알아줄 것이며(이 또한 외부를 의식하는 생각이다), 어디다 써먹을 것인가? 또 후회가 남은 시간을 떠올려 내고 바로잡다 보면.. 그럼 지금 흘러가고 있는 소중한 이 순간은? 어느 때고 지금이 가장 젊고 지혜로울 시기가 아닌가. 후회로 가득 찬 시간을 바로 잡겠다고 전성기라 할 수 있는 순간을 소비할 것인가?

당차게 "No! 그럴 수 없다" 생각했다.


교정을 걷던 중,

"지금 기분이 어때? 마음에 뭔가 해소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라는 질문에

"나는 학교에 오면 마음 한편이 답답해. 그때의 기억이 계속 떠올라.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어. 그때 왜 조금 더 열심히 하지 못했는지"

"응.. 그랬구나"

"그래서 배움에 한 비슷한 것이 있는 것 같아. 그렇게 답답함을 느끼는 것에 정답이 있지 않을까"

"....."

다음날 아침 내게 장문의 메시지가 와 있었다.


"학교에 올 때마다 찾아오는 답답함을 과거의 나에게서 찾을 수 있을 거라 했지? 내 생각에 그건 아닌 것 같아.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일 뿐이고, 그때의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판단으로 최선의 선택을 한 게 아닐까?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를 모르잖아.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나의 부족함을 알지만.. 지금의 나는 미래의 나를 알지도 못하는데 그때 가서 지금의 나를 또 아쉬워 한다면 평생 과거에 얽매어 사는 거잖아.

그거 찾으려고 하지 말고, 그냥 오늘 행복하게 살자. 나는 네가 있어서 너무 행복해. 나 역시 과거에 아쉬운 선택을 한 내가 미워 생각해 보게 됐어. 생각의 끝에 너를 만나기로 마음먹었던 날, 만나자고 용기 냈던 내가 너무 대견했어. 돌이켜 보면, 좋은 선택을 했던 나도 있는 거야. 결국 좋고 나쁜 건 없는 거야. 나쁜 게 가면 좋은 게 오고, 좋은 게 오면 나쁜 게 올 수도 있고 그런 거지. 그러니까 우리 자기 스스로를 사랑해 주고 지금 이 순간을 살자. 그래야 우리가 상황이 어떻든 서로 사랑해 줄 수 있을 것 같아.. 사랑해"


그랬다.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를 모르지만,

미래의 나는 지금의 나를 알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미래의 나 자신을 모르는 것이다.

결국 현재가 곧 과거이자 미래고, 미래가 곧 현재이며 그 순간들이 끝에 가서는 그때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에 집중하지 않으면

계속 과거의 기억에 얽매이는 뫼비우스의 띠에 갇히게 되는 것이다.

경험과 실수를 통해 지금의 내가 그때의 부족함을 깨달을 수 있다. 하지만 그때 기억을 계속 떠올리면서 이를 채우려 애쓴다면, 시점이 언제가 됐든 현재의 소중한 시간을 계속 지나가버린 과거에 쏟아붓고 있는 것이 된다. 잊혔거나 스쳐 지나간 것을 계속 떠올리면서, 지금 눈앞에 그때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는데도 이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즐기지도 못하는 것이다.


머리와 가슴에서 나오지 않고 빙빙 돌고 있던 답답함이 명쾌한 답변 한 마디에 시원하게 정리됐다.

지금의 나는 미래를 모르지만 지금 이 순간에 충실히 살면, 미래의 나는 지금의 나를 바라보며 잘했다고 말해줄 것이고, 지금 이 순간에 충실히 살지 않으면 미래의 나는 무표정으로 과거를 바라보면서 "더 잘했어야 했어.. 지금에라도.." 하며 과거에 집착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젠 아쉽고 좋지 않은 선택이었다 생각하는 것도, 그래도 내가 어떤 방향으로든, 좋게 흘러가려고 일어날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해 보자 마음먹었다. 그래, 좋고 나쁜 건 없는 거야.

그래서일까. 지금 이 순간이 너무 소중해서일까, 글을 쓰는 것도, 운동하는 것도 시간이 없어서, 상황이 어때서 말하며 더는 미룰 수 없다 생각했다. 인생이란 참으로 짧기에.


망설임.

내 과거 기억을 계속 옭아매고 있던 건 망설임이었다.

이게 나을까 저게 나을까 가늠질을 하고, 나를 던져보지 않고 간만 본 것 같다. 하고 싶은 것이 많으니 1번을 택했다가도 2번을 해보고 3번을 해보고, 그러니 찐한 기억이 없는 것이다. 내가 뭔가에 몰두해서 미쳐본 경험이 살면서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맛만 보고 끝 아니었던가.

그런 경험이 있는 사람은 참 행복한 사람이 아닐까 생각했다. 나는 지금에야 망설임을 떨쳐내고 올인을 해보자 마음을 먹게 된 시기가 찾아왔는데, 이것이 현재를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사람을 만나 그런 것 같단 생각을 했다. 내가 해야 할 일에 그렇듯, 그런 소중한 사람이 지금 옆에 있고, 그런 이에게 내 인생을 걸어보는 건 말 그대로 찐한 기억이 될 것이다. 그럴만한 가치가 충분한 건 말할 필요도 없고.

돌이켜보면 지금의 나는, 10년 전의 나와 별로 달라진 것이 없고 10년 전 내가 그랬듯 20년 전의 나를 붙잡고 놔주지 않고 있었던 것 같다. 어떻게든 내 과오를 바로잡으려는 생각이 은연중에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젠 보내주고 싶다.

그 과거의 기억으로 점철된 현재가 담긴 뫼비우스의 띠를 잘라버리고 싶다.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면서 말이다. 명쾌한 한 마디가 나를 각성시킨 탓인지, 현재를 소중히 하고자 하는 마음 때문인지 이 글을 빨리 마무리 짓고 싶어 새벽부터 일어나서 글을 썼다. 의미 있는 날이다. 10월 28일, 11월을 앞둔 2025년, 어쩌면 내 생의 반세월을 살고 나서 '지금 이 순간'의 의미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게 되었다니,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입버릇처럼 영어 단어 현재present 는 선물의 의미가 담겨 있는데, 지금이 곧 선물이란 뜻이라 말해도 가슴으로 와닿지 않던 것이, 이젠 마음 안에 들어온 것 같다.


어느 순간 문득, 미래에 아름답게 기억될 것 같은 그 느낌을 이젠 조금 알 것도 같다.

해리포터, 라이언 일병 구하기, 졸병 길들이기, 러브 액츄얼리 비디오를 학교에서 보고 노을 진 흙바닥 운동장을 창문 너머로 바라봤을 때, 강의를 듣기 전 설레했던 감정, 모든 것에 서툴러 어딜 가든 부끄러워했던 것들, 대학에 수시합격해서 입학했던 시기, 농구하고 축구하고 뛰어놀던 때. 생각해 보면 나는 학교를 참 좋아했구나 싶다. 그냥 그랬던 것 같다. 나는 학교에서 경험했던 모든 것이 좋았어서 이를 좋은 기억으로 추억하는 걸지도 모른다. 아쉽고 후회로 점철된, 상처로 얼룩진 학교 생활이 아니라 좋은 추억이 많았기에 기억하는 것일지 모른다.


그래, 좋은 선택을 한 나도 있었다.

좋은 기억들도 있었다.

아니, 좋은 기억들이 더 많았다.


이런 깨달음을 준 네게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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