옅은 어둠 속에서
수업이 막 끝나려던 참에 혁진이가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매점으로 가자, 너 500원 있냐?"
나는 손바닥을 펼쳐 허벅지 주변을 두들기며 돈이 있을까 하고 만져봤다. 바지춤에 아무런 감각이 느껴지지 않아 엉덩이 쪽으로 손을 가져가니 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이 바지 뒷주머니에 꼬깃꼬깃 접혀 있는 것이 느껴졌다. 내가 이걸 언제 집어넣었지 생각해 봐도 기억은 나지 않았다. 그 지폐를 주머니에서 꺼내며 말을 이었다.
"아니 그냥, 지금 여기서 얘기해 주면 안 돼? 뭔데 그래?"
"아니야, 가서 얘기하는 게 나을 것 같아"
아쉬운 놈이 져주는 수밖에 없으니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 녀석 뒤를 따라갔다. 무슨 대단한 일이라도 알고 있는 것처럼 양쪽 주머니에 손을 넣고서 내 앞을 리듬을 타며 걸었다. 귀에 꽂힌 하얀색 줄이어폰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혁진아"
그 말과 동시에 뒤를 돌아보는 걸 보고,
"너 그거 음악 나오는 거야?"
"아니"
"..... 근데 왜 끼고 있는 거야?"
"멋있잖아"
난 그런 겉 멋 든 녀석이 해주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생각이 없었다. 신뢰할 수 없는 녀석이었다. 평소에 무슨 생각을 하면서 교실에 앉아 있는 건지도 모르겠고 맨날 눈 밑에 까만 그늘이 지어 있었다.
우리는 초등학교 3학년이라고, 벌써 어디가 아픈 거냐 설마.
"아줌마! 저희 콜라랑 사이다 하나씩 주세요"
대답도 없이 음료수 두 캔을 계산대 위에 올려두시기에 천 원을 건네드렸고 우리는 매점 앞 벤치로 이동했다.
"야!"
"응?"
"말해 빨리. 뭐 하는 거야. 알려준다며"
"그게 그러니까, "
"아 답답해. 빨리"
그러는 사이 종은 울리고 나는 인상을 쓰면서 이야기했다.
"아 진짜, 느릿느릿 말 질질 끌고 뭐 하는 거야. 안 들어!"
"야, 야.. 잠깐만"
나는 씩씩 거리면서 교실로 올라갔고, 혁진이는 내 뒤를 뛰어오며 말했다.
"야 그냥 가면서 들어. 잘 들어, 내가 오밤중에 예주가 바깥에 나와 멍하니 서 있는 걸 본 적이 있어"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발걸음을 멈췄다.
진 선생님이 곧 수업을 하러 올 것이고, 내가 화가 난 것마저 잊은 채 되물었다.
"뭐라고? 네가 뭘 봤다고?"
"아니 글쎄, 한 밤중에 바깥에 나와서 멍하니 서 있는 걸 봤다고. 움직이지도 않고서"
"그걸 지금 나보고 믿으라고?"
"아니 진짜 봤다니까"
나는 생각에 잠겨 혁진이의 말에 아무 반응도 하지 않고 빠른 발걸음으로 교실에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알 수 없는 눈빛을 교환하는 혁진이와 나를 진 선생님은 의아하게 쳐다봤지만 우리에게 질문을 하거나 호통을 치진 않으셨고, 난 잠시 멍한 표정으로 교실 바닥을 바라봤다.
'한 밤중에.. 뭘 하고 있는 걸까? 대체'
방과 후 난 혁진이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묻지 않았다. 궁금하지 않냐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면서 더 묻기를 기다리는 듯한 표정은 묻고 싶은 마음을 차갑게 식혔다.
예주의 상태가 걱정이 됐다. 나는 집을 가려던 발걸음을 돌려 간호실로 향했고, 간호실 문을 열어보려 했지만 문은 닫혀있었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걸까.
"거기 문 강제로 열면 안 돼~"
뒤를 돌아보니 간호선생님이 화장실에서 나오시며 말을 걸었다.
"선생님 혹시 아까 벌에 쏘인..."
"예주 말하는 거구나?"
"네"
"예주는 아까 얼마 지나지 않아서 금방 괜찮아졌어. 아마 집으로 갔을 거야"
"방금 끝났는데요?"
"그럼 아마 가고 있을 수도 있겠지?"
"안 아픈 거죠? 예주는 안 아픈 거죠?"
"열도 내렸고 붓기도 많이 가라앉았어. 씩씩하게 가던 걸"
"다행이다.. 알겠어요. 감사합니다!"
"그래~ 조심히 가~"
나는 3층 계단을 미끄러지듯 뛰어 내려갔다.
지금 예주가 집을 가고 있다. 나는 물어보고 싶은 것이 많았다. 어디 살고 있는지, 또 집에서 몇 시에 나오는지, 학교를 올 때 어느 길로 오는지. 그리고 왜, 오밤중에 밖에 나와 멍하니 서 있는 건지 말이다. 벌에 쏘였을 때는 왜 그렇게 서럽게 울었을까, 원래 눈물이 많은 걸까, 난 그 모든 것들이 궁금했고 알고 싶었다. 혁진이같이 믿을 수 없는 녀석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 아닌 예주가 직접 말해주는 것을 듣고 싶었다. 나는 쉴 새 없이 달렸다. 예주가 집으로 가기 전에 묻고 싶었다.
"야!"
명식이었다.
나는 뛰던 발길을 멈췄다.
"아, 아깐 고마웠어. 그런데 나 지금 좀 급해서"
"예주한테 가는 거야?"
"......?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너 걔 좋아하냐?"
난 하마터면 그 질문에 바로 '응'하고 대답할 뻔했다.
"아니, 좋아하는 게 아니라 걱정돼서"
"네가 왜 걱정이 되는데? 너 좋아하지?"
맞아, 그랬다. 나는 왜 예주가 걱정이 되는 걸까. 좋아하는 것 말고는 다른 이유가 없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그런 것 같아"
"그럼 빨리 뛰어가!"
나는 나 못지않게 예주를 신경 쓰는 듯 느껴지는 명식이가 더 이상해 보였다.
"아니 그런데 너도 예주를 엄청 신경 쓰는데, 넌 무슨 사이야?"
"나? 나 예주랑 고향 친구야"
"고향.... 친구...?"
고향 친구라니, 예주는 그럼 이사를 왔다는 소리인가. 전학생? 난 갑자기 예주 혼자 쉬는 시간마다 화단을 오가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여자 아이들과 어울리면서 놀고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예주는 항상 화단에서 혼자 놀고 있었고 누구랑 어울리며 학교에서 돌아다니는 걸 본 적이 없었다. 혹시 왕따라도 당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더 이상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고향 친구였구나. 그래서.."
"일단 서둘러 가. 혹시라도 만나면 잘해줘"
"어.... 어, 그래. 알겠어"
하지만 나는 이미 늦었다고 생각했다. 학교 정문으로 향하는 길 양옆에 놓인 은행나무와 하굣길 왁자지껄 떠들며 집으로 향하는 친구들 사이를 지나 교문 밖을 뛰쳐나갔다. 밖으로 나와 좌, 우를 살폈지만 어느 곳에서도 예주는 보이지 않았다. 내일 학교에서 볼 수 있으니 그때 물어보자 생각했다. 그렇게 허탈한 마음으로 교문 앞에 서 있는데,
"만났어?"
명식이었다.
"아니. 가버린 것 같아"
"그렇지, 걔는 집 갈 때 걸어가지 않으니까"
"무슨 소리야?"
"예주는 집에 갈 때 차를 타고 가"
"차를 타고 간다니?"
"너 모르는구나. 예주네 집이 엄청 잘 살아. 부잣집이거든"
"아, 기사님이 있는 거야?"
"응.. 부잣집이지. 여기 오기 전에도 그랬고"
명식은 내가 모르는 예주의 어떤 일을 알고 있는 듯했다. 그런데 혁진이 이야기했던, 오밤중에 멍하니 밖에 서 있다고 이야기한 건, 도대체 무슨 말일까.
차를 타고 다닐 정도로 집이 학교에서 먼가, 아니면 원래부터 차를 타고 다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전학.. 온 거구나?"
"응 맞아"
"그러는 넌? 너는 왜 온 거야?"
"나 학원 가야 돼. 나중에 이야기하자"
"아니, 사람을 이렇게 궁금해 만들어 놓고 그냥 가버리면 어떻게 해"
"차차 알게 될 거야. 내가 예주를 따라 왜 여기까지 왔는지, 그리고 예주에 대해서도"
"아니.. 야!, 명식아! 야!"
나는 그렇게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집으로 가면서도 난 머리가 너무 아팠다.
'도대체 이게 다 무슨 상황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나는 생각을 정리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