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트하우스, 미명루
태권도장에서 나온 나를 끌고 명식이는 예주를 뒤로 한 채 어깨동무를 했고, 어디론가 나를 끌고 갔다. 문구점이 딸린 코너를 돌아 산부인과 병원 뒤편에 있는 중학교와 연결된 뒷골목길이었다. 중학생 형들은 거기서 담배를 피우곤했는데 우리가 갔을 때는 아무도 없었다. 말없이 따라간 골목길에는 적벽돌(빨간 벽돌)이 놓여 있었고 그 벽돌 위로 나와 명식은 걸터앉고, 예주는 무표정으로 서 있었다.
"대체.. 어디 있었던 거야?"
"......"
"어디 있었던 거야, 말해봐"
"......"
그날 이후로 몇 주가 지났지만, 마치 하루 만에 다시 물어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예주는 고개를 돌려 말하기 싫다는 듯 미간을 찡그린 채 바닥을 보고 눈을 내리 깔았다.
"진정해. 예주는 아무 잘못 없어, 네가 그렇게 얘기한다고 해서 상황이 달라지는 것도 없잖아"
"그 날, 네가 벌에 쏘인 날 뒤로 널 찾을 수가 없었어. 그때 내가 물어봤던 것에 대한 어떤 대답도 듣지 못했고, 또"
"또?"
"혁진이가 얘기해 줬던 것도 물어봐야겠어"
"혁진이가 뭘 얘기했는데"
가만히 듣고 있던 명식이 물었다.
"예주가 한 밤중에 가만히 서서 한 곳을 응시하고 있는 걸 봤다고 했어"
"그리고?"
"그리고 라니, 그럼 그게 정상이야?"
"아니 그것 말고 또 본 게 있냐고 묻는 거야"
"아니, 거기까지만 얘기를 들었어"
"그건 말이 좀 안 되는데"
".....?"
"만약 이상하다고 생각했으면 예주를 계속 보고 있었겠지. 혁진이는 분명 예주가 그 뒤로 어떤 행동을 취했는지, 어디로 갔는지 다 알고 있을 거야. 혁진이가 그런 말을 했는데, 왜 너한테는 예주가 그저 가만히 서 있었다는 말만 한 거지?"
"난 그런 건 안 궁금해. 그냥 알려달라고, 학교에 늦는 이유, 그리고 왜 그날 밤 가만히 서서 허공을 보고 있었는지!"
그때, 예주가 말했다.
"우리 집은.. 여기 없어"
다급한 목소리로 명식이 이야기했다.
"잠깐, 다 말할 거야?"
"응, 그럴 수밖에. 한 번 스쳤을 뿐인데 자꾸 내게 집착하는 건 이유가 있겠지"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집착? 하고 생각했다.
"난, 잠에 든 적이 없어"
".... 무슨 소리야?"
"잠들었다가 눈을 뜬 기억이 없다고"
그 순간 예주가 한 밤 중에 한 곳을 응시하면서 바라보고 있던 게 생각났다.
"그리고 내가 사는 곳은"
"....."
"미명루"
"미명루?"
"응"
"거기가 어딘데?"
"명식이가 어디까지 얘기했어?"
"네가 부잣집 딸이라는 소리 밖에 한 게 없는데"
"내가 차를 타고 학교를 오고 간다는 소리도 했어?"
"응 그 얘기까진 알았어"
"그렇군"
예주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밤이 되면 일부 기억이 사라져"
"그게 무슨..."
"말 끊지 말고 들어. 내 시간은 낮과 밤으로 나뉘어 흘러. 평범한 사람들과는 달라. 낮의 시간은 현세에 머물러 똑같이 흐르지만, 밤에 흐르는 시간은 조금 늦게 흘러. 그게 가능한 건 내가 살고 있는 미명루의 제일 끝 방, 공명실에 머무르고 있을 때야. 내게 남아 있는 밤의 기억은, 새벽 2시 이후 펜트하우스에서 나왔을 때, 아주 잠깐의 기억 밖에 없어. 그리고 나면 나는 학교 근처의 어느 집에서 깨어나"
나는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린지 알 수가 없었다. 시간이 늦게 흘러간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리고, 펜트하우스는 무엇이며, 미명루? 들어보지도 못한 처음 듣는 말에 정신이 없었다.
"혁진이가 나를 봤다고 했지?"
"응, 혁진이가 네가 그렇게 서 있는 걸 봤다고 말했어"
"그럼 내가 살고 있는 펜트하우스, 그 위치까지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네. 어쩌면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집의 위치까지.."
"잠깐만, 그런데 네가 시간이 늦게 간다고 하면, 너는 원래대로라면 우리보다 더 성장했어야 했다는 이야기잖아?"
"내 정신은 시간에 따라 흘러가. 신체의 노화만 늦추는 거지"
"공명실에서는 도대체 뭘 하는 건데?"
"말해 줄 수 없어. 나는 그저 주어진 일을 할 뿐이야, 지금 네가 있는 학교로 내가 오게 된 이유도 나는 잘 몰라, 그리고 네가 왜 나를 자꾸 쫓아다니는지도 모르겠고"
자기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 예주는, 내가 처음 봤던 인동초 화단에서 꿀을 빨아먹던 아이가 아니었다. 나보다 한참 나이가 많은 사람처럼 느껴졌고 딱딱한 말투로 말을 건네는 것이 여간 낯선 것이 아니었다. 가만히 담담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듣고 있던 명식을 보고, 난 궁금한 것이 생겨 예주에게 물었다.
"그럼, 명식이는 너한테 뭐야?"
"명식이는 내 고향 친구"
"그건 나도 알아. 명식이는 왜 너를 따라다니냐고"
"명식이는 이미 한 번 죽었어"
"흐이이이익! 죽었다니!"
나는 그 소리에 놀라 뒤로 넘어졌고, 다시 엉덩이를 탁탁 털면서 명식이로부터 한 걸음 떨어져 그 둘을 경계하는 눈초리로 바라봤다.
"예주.. 너 혹시 사람이 아닌 거야?"
"그럴지도 모르지. 나도 잘 모르겠어. 그렇지만 난 사람이랑 똑같다고 생각해"
"명식이 너는.. 죽었는데 어떻게 살아난 거야?"
"예주가 살려줬지"
나는 어지러웠다. 생각을 정리하면서 넋이 나간 채 서 있는데,
"명식아"
"응, 예주야"
"혁진이"
"응, 알겠어"
"혁진이한테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혁진이가 왜"
"우리 비밀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거든"
"그럼 나는?"
"너도 마찬가지야"
"나.. 날 설마 죽이려는 거야?"
"아니. 나와 명식이, 너, 그리고 혁진이는 미명루로 간다"
".... 언제..?"
"2월 23일, 보름 바로 다음 날, 새벽 1시. 이 자리에서 모이자."
"새벽에?"
"응, 그날 귀환식을 할 거야. 명월주기로 볼 때, 그날이 가장 좋아. 막계가 가장 얇아지는 달이니까"
"...... 무슨"
"그러고 나면, "
"?"
"내가 왜 그날, 한 곳을 바라보면서 그 자리에 서 있었는지 알게 될 거야. 그날, 다시 여기서 만나. 나는 내일부터 다시 학교를 가. 대신 아는 척하지 마. 절대 말하지도 마, 친구들에게도. 특히 혁진이 한테는."
"으.. 으응, 알겠어"
"그럼 그때 보자"
"그때 보자 초각"
예주와 명식은 골목길에 나를 내버려 둔 채,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먼발치서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예주를 기다리고 있던 검게 선팅 된 차량이 예주를 태우고 가는 것이 보였다. 명식은 나를 힐끗 보더니 제 갈 길을 갔다.
'사라질 때도 지 마음대로 더니 이렇게 할 말만 다 하고 사라지는 것도 제멋대로네'
귀환식.
명월주기.
막계.
펜트하우스, 미명루.
그리고,
미명루의 끝 방, 공명실.
'이것들은 대체 무엇일까, 그리고 앞으로 어떤 일이 생기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