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색 대청마루 바닥이 딸린 거실이 눈에 들어온다. 카메라가 클로즈업을 하듯 집 안을 천천히 하나 둘 살핀다. 창문을 등지고 있는 낡은 회색 소파가 벽에 바짝 붙어 놓여있다. 사람이 자주 누워있었는지 평균 성인 남성 등 크기 정도 움푹 들어간 자국이 남아있다. 창문 맞은편으로 반쯤 열려 있는 문이 보인다. 창고로 쓰이는지 살짝 열린 문으로 커다란 박스들이 가지런히 쌓여있는 것이 보인다. 문 틈으로 찬 바람이 솔솔 흘러들고 있고, 문 옆으로 천장 높이에 꼭 맞는 책장이 나무처럼 우뚝 서있다. 선반에는 세로로 혹은 옆으로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는 듯하면서도 질서를 갖춘 책들이 쌓여있다. 거실은 군더더기 없이 간소하고 가벼운 느낌이다. 텔레비전도 없고 책장과 나무로 된 큰 책상을 빼면 의자 두 개와 책을 읽을 때 편하게 누워있을 요량으로 구매한 일인용 소파가 전부다. 유난히 책이 많이 놓여있다 느껴지는 공간이다. 거실 책상 위아래로는 닫혀있는 노트북과 세월의 흔적이 엿보이는 싱잉볼이 가지런히 놓여있고 책상 위에는 작은 화분 안에 나뭇가지가 얇고 잎이 하늘하늘한 식물이 줄기를 길게 뻗어 책상 위에 닿을 듯 말 듯 넘실거린다. 먼지 하나 없는 거실이 집주인의 성격을 예상하게 만든다. 창 밖으로 들려오는 참새 지저귀는 소리에 아침이 왔음을 직감한다. 아침 햇살이 벽면을 타고 창문을 너머 식탁 위로 미끄러지듯 늘어진다.
미닫이 문 틈으로 주방이 보인다. 안에는 둘이서 식사하기 꼭 적당한 검은색의 직사각형 모양 소형 식탁이 주인처럼 놓여있다. 식탁 의자에 한 남자가 왼쪽 팔로 턱을 괴고 조금 구부정한 자세로 앉아 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무슨 생각에라도 잠긴 듯 주방 천장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려 바라본다. 커피잔을 코 끝으로 가져와 한 입 마시려다 뜨거운지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입을 오므린다. 그래도 맛은 만족스러운지 눈썹을 치켜올리며 "음" 한마디 내뱉는다. 옅은 눈썹 탓인지 큰 눈과 넓적한 얼굴, 각진 얼굴이 도드라져 보이고 얼굴은 약간 홍조를 띠고 있다. 커피가 넘치지 않게 조심스럽게, 그리고 아주 천천히 느릿한 발걸음으로 코를 고는 소리가 들리는 방을 향해 걸어간다. 주방과 마주 보고 있는 문을 향해 걷는데 오른쪽 다리 힘이 더 센 건지 발을 디딜 때마다 마루에서 으드득 눌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새 지저귀는 소리에 발소리가 묻히길 바라는 마음으로 발 끝을 세워 고양이 발걸음으로 살금살금 방문 앞으로 이동해 문을 천천히 연다.
하얀 침대 시트 위로 한 여성이 잠들어 있다. 검은 생머리가 물결치듯 베개와 침대로 흘러내렸고 작은 얼굴은 머리에 파묻힌 듯 잘 보이지 않는다. 한 걸음씩 다가가 얼굴을 살피니 입을 벌리고 침을 흘리며 잠들어 있다. 코를 고는 소리가 우렁찬 걸 보니 며칠 전 갔던 인도 기행이 꽤나 피곤했던 모양이다. 흘러내리는 침을 티슈로 천천히 닦아주며 자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니 인기척에 실눈을 뜬 여자는 남자를 바라보며 웅얼거린다.
"응... 당신 일어났군요"
"당신 어제 많이 피곤했나 봐. 여기 커피 내렸는데 한 잔 마셔요."
"조금만 더 자고 싶은데 테이블에 좀 놓아줄래요?
".... 응, 그런데 오늘 일정 괜찮겠어요?"
여자는 인도를 다녀온 것도 잠시 국내 일정이 연이어 잡혀버린 바람에 옅은 한숨을 짧게 내쉰 뒤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이야기한다.
"확인해 봤는데... 문제 될 건 없어 보이네요. 몸이 조금 피곤한 것 빼고는. 조금 더 자고 싶은데"
"시간은 조금 늦긴 할 것 같은데, 오늘이 연휴 마지막 날이라 차가 별로 없을 것 같긴 하네요. 어디 보자... 응, 시간 내로 갈 수 있을 것 같긴 해요"
"늦진 않겠지만 중요한 자리니까 꼭 제 때 도착해야 해요. 오늘 요가원 오픈 전 마지막 점검이니까요"
추석 연휴가 지나고 운영해야 할 사람은 그녀였지만 오히려 남자가 더 걱정하는 듯했다.
"... 그럼 20분 정도는 될 것 같아요"
여자는 옅은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고 다시 눈을 감고 침대 위에 누웠다. 평소 잠이 많은 여자를 배려하는 듯 보이는 남자는 거실로 다시 향했고 회색 소파 위에 바로 누워 눈을 감고 생각했다.
'드디어 다 와가는구나. 구, 십, 십일... 거의 12년 남짓 시간이 흘렀군...'
호흡이 얕아져 잠에 들려고 하는데 방에서 벌떡 일어나는 소리가 들린다. 인기척에 놀란 남자는 바로 일어나 소파에 바르게 앉아 문쪽을 바라본다.
'무슨 일이지?'
여자는 방문으로 걸어 나왔고 식탁에 놓인 커피를 집어 들며 미지근하게 식어버린 커피를 단 숨에 벌컥 들이켰다. 그 모습을 보고 놀란 남자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없이 몇 초간 그녀를 응시했다. 하지 않던 행동을 하는 사람을 바라보는 눈빛으로 궁금하다는 듯, 의아하다는 듯.
"아, 오늘은 예외로 하죠. 안 되겠어요 잠이 다 깨버렸네요. 그리고 방금 스승님께 메세지가 왔어요"
"응...? 혹시 연락을 드린 걸까요?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음... 뜻깊은 날이 될 것 같네요"
"세안만 간단히 하고 출발하는 걸로 하죠"
"혹시 옷은 어떻게 입어야..."
"당신은 편안하게 입어요. 어차피 오늘 오픈기념 첫 수련은 제가 지도하지 않아요"
"혹시 스승님이 하시는 건가?"
"그래요. 오늘은 특별히 부탁드렸어요. 내 뿌리가 누구인지 명확히 하려고요"
"하지만 당신 요가원인걸요"
"그분이 안 계셨다면 지금의 저는 없을지도 모르니까. 좋은 기운으로 수련공간을 채우고 싶은 것이지 그 어떤 의미도 없답니다"
"그게 당신 뜻이라면요. 좋아요. 준비해요. 난 가서 차 시동 좀 걸어놓을게요"
아침저녁으로 쌀쌀한 기운이 돌고 있었고 낮 기온은 따뜻했다. 추위를 많이 타는 그녀였기에 차를 따뜻하게 해둬야 했다. 이동하면서 먹을 브런치 토스트와 과즙 음료를 런치 박스에 담아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에 올려두고 그녀를 기다렸다. 토스트 위로 올려진 아보카도는 과하게 으깨지지 않은 채, 얇게 슬라이스 되어 있었다. 연한 초록빛이 겹겹이 포개져, 일부러 흐트러뜨린 꽃처럼 보였다. 빵 가장자리는 바삭했고, 안쪽은 아직 따뜻했다. 이 타이밍에 먹는 게 최적이지만 그녀가 제때 나올 것 같진 않았고 그는 먼저 먹을까 하다 과즙만 두 어 차례 마셨다. 그리고 한 10분 지났을까, 조수석 백미러로 그녀가 달려 나오는 것이 보였다. 졸린 얼굴은 온 데 간데없고 밝은 표정으로 문을 열며 기운찬 목소리로 말했다.
"생각보다 빨리 나왔지? 빨리 가자"
"이거 아침에 좀 만들었어. 배고플 텐데 좀 먹어요"
"응, 고마워. 잘 먹을게요"
하늘에 뜬 뭉게구름은 어느 때보다 맑고 푸르렀고 햇살은 따뜻했다. 둘은 도로를 따라 요가원으로 향했다. 길 양옆으로 이어진 돌담은 모두 같은 색처럼 보였지만, 가까이 보면 저마다 다른 결을 가진 현무암이었다. 검고 거칠었고, 틈 사이로 자잘한 풀들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담은 일부러 어긋난 채 바람이 빠져나갈 자리를 비워두고 있었다. 강은 넓지 않았다. 제주에서 물은 늘 조심스럽게 흘렀다. 바닥의 돌이 먼저 보였고, 그 위로 물이 얇게 미끄러지듯 지나갔다. 바다로 이어지는 방향을 알고 있는 듯 흘러가는 물결이 보였다.
누구보다 오늘을 손꼽아 기다렸을 그녀였기에 남자는 고개를 슬쩍 돌려 그녀를 바라봤지만 그녀는 생각보다 담담해 보였다. 왜일까? 왠지는 모르겠다. 괜찮은 건가 싶어 남자가 한 마디 건넸다.
"기분이 어때?"
"...."
"무슨 기분인지 나도 잘 모르겠지만, 알 것도 같아"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왜, 좋은 날인데"
"그냥... 지금 이 모든 것이, 원래 이렇게 흘러와야 할 것이었다는 듯이 느껴진다면 당신 믿겠어요? 이게 내가 가야 할 길이었다는 걸 이미 그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말이죠"
"그래서 무덤덤한 표정으로 좋다고 말도 안 하고 있는 거야?"
"그런 것 같기도 해요. 사실 이 순간은 12년 전 당신을 만나기 전부터 생각한 순간이니까요"
"그럴 수 있지. 시간은 걸렸지만 기어코 마음속으로 그리던 곳에 도달하게 된 거겠지"
"당신도 마찬가지 아니에요?"
"... 응, 맞아. 그치만 난 우리가 1년도 채 만나지 않았을 때 이 순간을 기다려왔던 것 같아. 당신이 말을 한 순간부터 당신은 요가원을 운영하는 선생님이 되기를, 나는 그 요가원 옆에 비건을 위한 카페를 운영하길 바랐지. 결국... 이루어진 것 같아"
"당신도 나도, 고생이 많았지요"
"당신이 더 고생 많았지. 아이가 생겨서 잠시 주춤했지만 감사하게도 하늘이 하율이가 잘 커줬지. 이제는 말도 잘하고 혼자서도 척척 다 하니까"
"그래도 당신이 관심을 더 가져줘야 해요. 아빠의 역할은 그 어떤 것도 대신해줄 수 없으니까요"
"응, 그건 앞으로도 그럴 거야. 걱정하지 마"
"고마워요"
추위를 잘 타는 그녀는 덥다며 창문을 열고 히터를 껐다. 익숙한 듯 그도 운전석 창문을 열고는 차장을 타고 들어오는 바람을 느꼈다. 짠내가 희미하게 섞인 향이 약해지는 것을 보니 바다와 조금씩 멀어지고 있었다. 제주의 바람은 늘 방향을 달리하며 불었지만, 나무는 한쪽으로만 자라난 듯 보였다. 한 방향을 향해있는 나무를 보며 그녀는 뭔가 깨달은 듯 살짝 웃었다. 그녀의 요가원은 그 작은 돌담이 끝나는 지점과 연결되어 있었다. 낮은 돌 위에 흐르던 물살이 얕아지고 바람이 잦아드는 곳. 이제 갓 자라난 듯 보이는 팽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 곳. 바람 부는 소리와 파도 소리가 잠잠해 고요함이 맴도는 그런 장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