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반 아래로 떨어진 쪽지를 지나 수련원 안으로 들어가는 다은의 발끝이 앵글에 잡힌다. 우리의 시점은 한 걸음 떨어져 클로즈아웃 된다. 문에는 은으로 된 둥근 원형의 손잡이가 큰 귀걸이처럼 걸려 있다. 열려 있던 문이 닫히면서 미세한 진동이 느껴진다. 여섯 명의 도반이 지나간 복도에는 그사이 미세한 먼지가 소용돌이치듯 모였다가, 산발적으로 바닥을 향해 떨어진다. 대각선으로, 좌우로, 어떤 경우 수직으로 낙하한다. 백칠십 센티미터 정도 높이의 큰 창문에서 내리쬐는 햇살은 먼지의 움직임을 관찰하듯 세세하게 비추고 있다. 남서향을 바라보게 만든 창문이라, 때와 상관없이 햇살이 풍부하게 들어온다.
그런 광경을 선우는 복도에 서서 잠시 동안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 그는 지유가 있는 수련실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자신이 할 일은 이제 끝났다 생각하는지 숨을 옅게 내쉬고는 고개를 숙인다. 잠시 눈을 감는다. 닫힌 방문 너머 도반들의 발소리라도 들려올까 했지만 그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벌써 자리를 잡고 앉은 걸지도 모른다. 방 안의 사람들은 오랜만에 만난 재회의 기쁨을 나누거나 대화를 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다. 말소리는 전혀 들려오지 않는다. 그러길 몇 초 지났을까, 눈을 감고 있는 선우의 미간이 살짝 꿈틀거린다. 그는 뭔가 생각난 듯 눈을 뜬다. 복화술을 연상케 하는, 거의 움직이지 않는 입모양새처럼 보이지만, 그의 입으로 추정컨대 '오실 때가 됐는데'라고 말한 것 같다. 위아래 입술이 몇 번 붙었다 떼어지더니 이내 닫힌다. 급한 일로 잠에서 막 깨어난 사람처럼 선우는 들어온 문을 향해 잰걸음으로 서둘러 나간다. 하지만 선우가 사라진 자리에 카메라 시선은 고정되어 있다. 그 앵글은 수련원으로 연결된 문을 향하다가, 다은이 들어설 때 바닥에 떨어트린 쪽지를 향해 확대된다. [ '... 우리의 이야기... 마지막 한 분... 오셨을 때, 그때 시작....' ].
밖으로 나간 선우는 하늘을 바라보며 숨을 크게 들이쉰다. 30초 정도 지났을까, 하늘을 그렇게 바라보다 이내 시선이 땅으로 향한다. 화강석 디딤돌이 자연스레 시야에 들어온다. 시선을 이리저리 옮겨가다 돌길이 시작되는 요가원 입구 쪽을 향한다. 요가원 입구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조금 늦으시는 건가...' 선우는 생각한다. 목이 타는지 헛기침을 몇 번 하고는 차를 한 잔 마셔야겠다 생각한다. 그리고는 요가원 건물 옆에 딸린 작은 다실(茶室)로 향한다.
공간은 작고 아늑하다.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원형 나무 테이블 하나, 그 양쪽에 놓인 의자 두 개, 벽면에 붙박이처럼 붙어 있는 긴 나무 의자들, 그리고 차를 내기 위해 준비된 직사각형 모양 테이블 하나. 편안함에 취해 잠이 들거나 오랜 시간 머물기 위한 휴식 공간으로 만들어진 건 아닌 것 같다. 다대(茶臺)로 이동한 선우는 두리번거리며 우려낼 차를 찾는다. '보이차가 어디 갔지?' 다대 선반 아래 놓여있는 보이차. '아, 여기 있네' 선우는 이어 포트를 꺼내 물을 넣고 스위치를 탁 켠다. 아래로 향한 시선을 들어 올려 돌길 쪽으로 난 탁 트인 창문 밖을 무심결에 바라본 선우는 본능적으로 흠칫 놀라며 몸을 움찔한다. 목 뒤쪽의 승모근부터 팔뚝까지 오돌토돌한 닭살이 돋아났다.
다실과 조금 떨어진 곳에 누군가 수련원 건물을 바라보며 서 있다. 선우는 그 누군가의 작은 움직임들에서, 거리 탓인지 모르지만, 어떤 것도 느낄 수 없다. 본디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공간의 어떤 흐름도 역행하지 않고- 순리를 따라가듯 느껴지는 그런 고요한 움직임만이 그녀를 감싸고 있다. 요가원을 바라보던 시선은 지유와 선우가 심은 팽나무 뿌리를 향한다. 아래에서 그리고 천천히 위로, 이제야 그늘을 만들 크기로 자라난 팽나무 나뭇가지를 지나 나뭇잎으로, 끝자락에 가서는 산산한 바람에 흩날리며 잎 부대끼는 소리에 눈을 감고 하늘로 고개를 든다. 선우는 그 누군가로 짐작되는 사람이 지유의 스승이란 사실을 직감한다. 한 순간도 구부정한 자세나 빈틈이 느껴지지 않는다. 곧게 세워진 척추와 허리, 통 넓은 바지 안으로-잘 보이지 않지만-땅에 뿌리를 내린 듯 힘이 느껴지는 망설임 없는 발걸음. 길이 어느 곳을 향해있더라도 피하지 않을 것 같은, 정도(正道)의 길만을 밟아온 수행자의 모습이다.
'... 그분인가...' 차를 마시는 건 고사하고 선우는 서둘러 밖으로 향한다. 수련원 문을 향해 걷고 있는 그녀의 뒤를 빠른 걸음으로 따라간다. 무슨 이유인지 뛰어가 놀라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다. 저 앞에 팽나무를 지나 땅을 보며 천천히, 익숙한 곳에 소풍이라도 온 듯, 뒷짐을 진 채 낮은음으로 허밍 하듯 소리 내며 걷고 있는 그 누군가. 선우는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하다 자신이 뒤에 있음을 일부러 알리기라도 하려는 듯 돌길 위를 소리 내어 걷는다. 입구로 향하던 앞의 그녀는 오른쪽 발을 돌길 위에 얹으려다 이내 발을 나란히 하고 곧게 서 천천히 고개를 뒤로 돌린다. "아...!" 마침내 그녀를 정면으로 얼굴을 마주한 선우는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분위기와 안광에 압도당하고 만다. 하려던 말마저 잊어버린 듯 느끼고 있는 그였다. 선우는 당연히 앞에 서있는 누군가는 지유의 스승임을 확신한다. 그리고 먼저 말을 꺼내주길 기다리며 자세를 고쳐 선다. 은은한 미소와 투명한 눈을 마주하고 있으니 선우는 마치 자신의 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느낌을 받는다. 일종의 신비감을 느끼며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애매한 표정으로 그녀의 눈을 보는데 경외감이 편안함으로, 편안함이 부끄러움으로 이어졌고 안 되겠다 싶은 순간 그녀가 먼저 말을 꺼냈다.
"제가 조금 늦었습니다. 지유 님은 안에 계시는지요"
"아... 네, 지유는 안에 있습니다."
"... 나무가 먼저 자리를 잡았군요. 혹시 이 나무는..."
"함께 심었습니다. 요가원을 짓기 한참 전에요.. 이제 겨우 저 정도로 성장했습니다"
"... 햇살이 머물고, 계절은 서두르지 않습니다"
"...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사람을 오래 머물게 하는 고요한 터입니다.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킵니다. 지유 님이 제게 늘 이야기하시던 그런 공간입니다"
"그렇습니까..."
"제가 괜한 소리를 늘어놓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흘러 들어주시지요"
"... 모두 안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픈일에 손님은 저 하나뿐인지요"
"함께 온 도반들이 있습니다. 얼마 전에 인도 기행을 다녀왔던..."
"그렇습니까..."
"왜 그러시는지요"
"오늘 오픈일 기념 수련 시간이 조금 길어지겠습니다"
"지유가 오픈일 지도를 부탁드린 건가요?"
"... 오늘은 지도라기보다는 몸의 기억으로..."
"...?"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 안내를 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네 물론입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선우는 신비함과 두려움이 뒤섞인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먼저 앞질러 걸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선 뒤 문과 그녀를 번갈아 바라보며 잘 따라올 수 있도록 계속 확인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그녀의 시선은 보이는 것 너머 다른 것을 들여다보는 듯 오래, 또 깊게 머물렀기 때문이다. 선우의 안내보다 수련원 자체의 형태에 관심을 보이는 그녀였다. 선우는 그녀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이쪽입니다" 그녀는 선우를 쳐다보더니 고개를 한 번 끄덕였고, 수련실로 향하며 기분 좋은 표정을 하고 웃었다.
그녀가 은고리가 달린 문을 향해 걸을 때, 우리의 시선은 수련실 안으로 먼저 이동한다. 가부좌를 틀고 있는 여섯의 도반과 맨 앞 정중앙에 앉아있는 지유가 보인다.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고요함 속으로, 집중해 듣지 않으면 들을 수 없는 아주 얕은 숨소리만 가끔 들려온다. 어떤 연유로 지금 이렇게 있어야 하는 건지 영문을 모르는 여섯 명의 도반 중 다은의 표정이 평온하지 않다. 얼핏 보면 화가 나 있는 듯하다. 말이 많던 채린의 표정은 평온하지만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다. 언제까지 이렇게 하고 있어야 하는 건지 감이 오지 않아 괴로워 하는듯 보인다. 채린은 더 이상 안 되겠다 싶은지 엉덩이를 조금씩 들썩 거렸고 말을 해야겠다 생각한다. 지유에게 묻고 싶은 것이다. 대체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설명해 달라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 순간, 지유의 스승이 문을 열고 들어온다. 오른발을 쭉 뻗어 들고 공중에 잠시 머무른다. 이어 바닥에 천천히 딛는다. 위아래로 천천히 움직이던 지유의 어깨가 멈춘다. 잇따라 지유의 호흡이 달라진다. 수련실의 기운이 달라지는 것을 느끼고 지유의 스승이 앞에 와 있다는 걸 분명히 느낀다. 눈을 떠 보고 싶지만 눈을 뜨지 않는다. 지유의 눈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한다.
여섯 명의 도반과 지유를 바라보고 있는 자리, 지유의 바로 앞자리에 천천히 앉으며 스승은 운을 뗀다.
"오래 기다리셨지요. 제 이름은 정선, 지유 님의 옛 스승입니다"
지유의 눈에서는 알 수 없는 눈물이 떨어진다.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정선은 그런 지유를 바라보며 말없이 부드럽게 웃는다.
"울지 마시지요. 지유 님"
지유는 그 말을 듣고는 어깨를 들썩이며 운다. 소리는 내지 않는다. 눈물샘이 마를 때까지 울 것 같다. 그런 지유를 바라보던 정선이 다시 이야기한다.
"다 쏟아내시지요"
도반들은 동시에 눈을 떠 정선을 바라본다. 여섯 명의 도반은 정선이 내뿜는 기에 빨려 들어가듯 몸이 그쪽을 향하고 무슨 일이라도 생길 것 같은 기분에 겁먹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본다. 단 한 명, 지유를 제외하고는.
"더 기다리게 하면 안 되겠지요"
선우가 그랬듯, 일곱 명의 수행자들은 그녀가 하는 말을 기다릴 뿐. 한마디 말조차 꺼내지 못했다. "다시, 눈을 감아보시지요" 이어 정선이 말했다.
"가보겠습니다. 여러분이 계셨던 인도, 그 심연 속으로. 저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