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력을 유지하는 일

도쿄에서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홍콩으로 예술 여행을

by 조서형



일본의 최북단에서 돌아오자 도쿄는 이미 봄이 온 것처럼 따스하게 느껴졌다. 그동안엔 뻔뻔스럽게도 남의 땅에 왔으면 육개월 쯤은 진탕 헤매주는 게 예의라는 생각이었다. 그런 내게도 '이제 다음엔' 어떻게 해야할 지 생각해 볼 시간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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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구인난을 겪고 있으며 취업률이 120%나 된다는 이야기를 뉴스를 통해 몇 번이나 들었기에 왠지 취업에 자신이 있었다. 헤드헌터에게 이력서를 돌린 다음에서야 겨우 상황파악이 되었다. 식당에서 주문을 겨우 할 정도의 일본어에, 특별한 디자인 기술이나 산업지식이 없는 나라면 이대로 놀다가 한국에 돌아가게 될 것이었다. 어학원에 등록하거나 한국 회사에 취직하기 등 여러 선택지를 둘러보다가 일단 일본어 공부를 하기로 결정했다. 주변의 도서관을 찾아가 문제집을 꺼내어 놓고 형광펜을 죽죽 긋다보니 미래에 올 수도 있을 여러 사건들에 대한 고민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무겁고 또 심각하게 찾아왔다. 당장 외국계회사에 입사하여 4개국어로 프레젠테이션을 하고 해외 출장 비행기에 올라타는 잘 나가는 사원이 된다거나, 운좋게 눈에 띄어 인기 사진작가가 되고 싶었다. 앉아 있으려니 외려 나만 성장이 멈춘 듯 조바심이 나서는 앞서 나가 달리고 싶어 안달이 나고 불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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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력은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을까. 사이토 다카시는 자기력을 계속 유지하는 힘이 젊음이라고 했다. 난 공부와 취업준비에 앞서 친구들에게 선언을 했다. 더 이상 놀자고 조르는 사람이 없었고 난 다시 덩그러니 혼자였다.

스스로를 관리하고 통제한다는 것은 폭풍우 속 항해와 같은 일이었다. 배가 우현으로 기울면 무게를 좌현으로 옮겨 균형과 비율을 찾아야 했다. 이전처럼 맘껏 떠들고 놀지 못해 남아도는 에너지는 기술로 전환해둬야 할 시기다. 노력이 습관이듯 도전도 습관이다. 멀리 있는 중학교에 다니기 위해 당연하게 배웠던 자전거를 10년이 지나도 자연스럽게 탈 수 있듯, 지금 만들어나간 마음가짐은 나이가 들어도 내가 어떤 일에 용기내어 도전할 수 있도록 해 줄 것이다. 실제로 고독한 시기에 자신을 단련했던 경험이 있는 사람은 필요하면 언제든 그 상태로 돌아갈 수 있다고 한다. 고독은 도전이며 그 속에서 균형을 유지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위험한 일이라면 언제나 환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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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하는 대로 살기는 어렵고 주어진 24시간은 모자라거나 넘쳐서 벅차다. 부모님은 점점 내게 조바심을 내시기 시작하셨고, 내게도 역시 많은 기회비용이 생겼다. 생각처럼 쉽게 취업이 되지 않자 이제라도 한국에 돌아가서 자격증을 준비하고 취업스터디에 참여할까 돌아보게 되었다. '대학교 땐 꽤나 괜찮았던 것 같은 데 이럴 리 없어.' 애꿎은 현실부정만 한나절 내내 혼자 속으로 늘어놓기도 했다.

대기업을 그만두고 도쿄로 워킹홀리데이를 온 친구는 냉철하게 내 고민을 읽어주었다. 내가 졸업 후 얌전히 회사를 다녔을 리가 없으며 설사 운좋게 입사했다고 해도 세상 구경을 해야된다며 뛰쳐나왔을게 뻔하다고 했다. 부딪히는데로 휘청이는 게 나였다. 이야기를 듣고보니 또 그럴듯했다. 안전벨트라고 생각했던 게 사실 족쇄일 수도 있는 것이다. 절실하게 목숨 건 적도 없으면서 기회가 없다고 투정을 부린 걸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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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부터 시작해야 했다. 인맥, 취업순서, 채용사이트 등 가진 정보가 하나도 없었다. 개털이었다. 될 거라는 보장이없지만 도쿄에서 제대로 취업을 해 보리라 다짐했고 일본어 자격시험을 볼 수 있도록 신청했다. 언제 그랬냐는듯 흥분의 호르몬이 뿜어져 나왔다. 새로운 계획을 세우는것 만으로 우울과 권태에 맞서 싸울 수 있었다. 놀라울 만큼단순한 구조의 머리임이 분명했다.

금새 외워야할 것, 실천해나갈 계획, 새로운 도전을 잔뜩 제공받은 뇌는 즐거워졌다. 물레방아에 빻을 곡식이 잔뜩 들어온 것 처럼 머리는 굴릴 수록 풍족해졌다. 평일엔 도서관에 앉아 일본어 단어를 외웠고 주말엔 생활비를 벌기 위해 호떡을 구웠다. 가끔 외국인을 채용하는 공고를 뒤적이거나 유학생 취업 박람회에 참여하기도 했다. 한 달 반을 꼬박 얌전히 지낼 수 있었던 데는 사실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었다.

작년에 일찌감치 예매해 둔 4월, 홍콩행 비행기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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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경험하고 많이 살아내라. 죄라도 많이 지어라. 제일 나쁜 것은 젊은 애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움츠리고 있는 거야. 영화나 책 속으로라도 들어가 모험을 해라. 늙어보니 추억만 남는다."는 공지영 작가님의 이야기는 잘 하고 있던 공부를 멈추고 놀러 나갈 때 좋은 변명거리가 되어준다.

오래된 필름 카메라를 분신처럼 들고다니던 나와, 빈티지 옷 가게에서 일하는 일러스트레이터 사야 그리고 가수의 꿈을 안고 상경한 열일곱 살 마리아는 같은 쉐어하우스에 살면서 친해졌다. 홍콩에서 세계 최대 규모의 예술 전시회가 열린다는 얘기를 듣고 그 자리에서 세 명의 비행기와 전시회 표를 구매해뒀다. 앞 날이 어떻게 될 지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예술이란 황홀한 것이며 함께 하게되어 기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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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이 왔다. 나는 작년에 이미 쉐어하우스를 나왔고 둘은 같이 춤을 배우다 다툰 이후로 말도 안한다고 했다. 3박 4일간의 홍콩은 도피처가 될 수 없다. 또 숙소를 못 찾아 헤맬 것이다. 도착해서도 주인과 연락이 안되어서 곤란할 것이다. 집에 있었으면 아낄 수 있었을 돈을 쓰게 될 것이고 못 견디게 덥거나 지겹게 비가 올 것이고 새 친구들을 사귀느라 낯을 가릴 것이다.

공항으로 떠나가기 직전에야 거의 아무것도 챙겨넣지 않은 가방을 우울하게 주섬주섬 챙겼다. 마리아와 사야는 편의점에서 가스비를 지불한다, 우체국에 들러야 한다 난리를 치느라 체크인 카운터가 닫히기 직전에 겨우 머리를 내밀었다. 전 날에 고향까지 내려가서 여권을 챙겨온 어린 마리아의 여권은 유효기간이 이미 지나있었다. 비행기에 탑승 할 수 없다는 승무원의 선언에 자리에서 한참 눈물을 쏟던 그녀는 비교적 담담하게 집으로 돌아갔다. 이어지는 여섯시간 동안 사야와 난 좁은 좌석에 웅크린 채 굶주림에 싸웠다. 얼마없던 기대치마저 0으로 떨어진 채 홍콩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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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리자마자 비싼 수수료를 치르고 공항에서 환전을 마쳤다. 사야는 도쿄에서 내 룸메이트이자 벙크메이트(bunkmate)다. 2층 침대를 나누어 쓰는 사이었지만 사야는 그 단어가 군대 동기들 같다며 질색한다. 파란 눈에 금발을 한, 학창시절을 뉴욕에서 보낸 그녀는 일본인 어머니를가진, 나가사키 출생의 일본인이다. 일본 여권을 들고서도 공항에선 거의 매번 외국인 창구로 보내지곤 했다. 숙소까지 가는 길에 사야는 내 여권을 보고 또 봤다. 이렇게 여행 다닐 돈이 어디서 났냐며 연신 부러워했다. 나는 짐을 간소하게 준비했고 수속을 늘 가장 빨리 마쳤다. 숙소까지 찾아가는 길을 미리 알아왔으며 빼먹은 게 생겨도 당황하지 않았다. 사야는 내게 똑똑하며 치켜세워줬지만 난 이게 다 엄청난 돈, 엄청난 시간, 길바닥의 눈물과 콧물이라며 시니컬한 대답을 내 주었다.

애먼 창구에 서 있다가 비행기 놓치기, 여권 케이스만 들고와서 비행기 놓치기, 비자 문제로 입국거부 당해서 비행기 놓치기, 시계 잘못 봐서 공항 죽도록 뛰어가기, 예매 날짜 실수하기, 종류별로 시도때도 없이 물건 잃어버리기, 쓸모없는 물건을 말도 안되게 비싸게 사들고와고서 아까워서 못 버리기, 사기당하기,큰 돈 잃어버리기, 버스 반대로 타기, 길 못찾기, 외국어 못하기, 비밀번호 분실, 와이파이 부재, 아프기, 다치기, 양조절 실패, 환전 수수료, 공항에서 압수 당하기 등 이야기를 듣던 사야는 금새 질린 표정이 되었다. 사실 그런 일들을 겪고도 좀처럼 익숙해지지는 않는다. 다시 내겐 처음인 환경이 펼쳐지고 여전히 무섭고, 때론 시간과 돈이 아깝다.

모험은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게 아니다. 완벽한 새 환경에 처해 바보가 된 나를 구경하며 겸손해지고 극적으로 위험에서 빠져나와 가슴을 쓸어내리며 나를 존경할 수 있는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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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 돈과 입을 옷, 먹거리를 신중하게 선택하며 내 몸의모든 감각을 초 예민상태로 움직일 수 있는, 돈이 가장 많이 쓰이는 동시에 돈을 가장 효율적으로 '잘' 쓸 수 있는 일이다. 여전히.

숙소까지 구글맵으로 45분이 걸리는 거리를 3시간이나 걸려서 겨우 도착했다. 기진맥진한 나와 달리 사야는 에너지에 넘쳐 야시장에 가자고 졸라댔다. 홍콩에 도착해서는 계속 “I'M EXCITED TO ~” 구문을 사용하는 그녀의 레퍼토리에는 “시장 구경할 게 기대돼, 딤섬먹을 게 기대돼, 홍콩 사람들을 만날 게 기대돼, 많은 예술을 볼 생각에 기대돼, 생에 처음으로 칭다오 맥주를 마실 게 기대돼. 숙소에 돌아가서 오줌을 쌀 일이 기대돼, 샤워하고 누워서 너랑 이야기를 나눌 게 기대돼.” 등 무수한 기대가 오롯이 담겨있었다. 꿀꿀하게 시작한 여행이 그녀덕에 조심스럽게 소박하면서도 화려한 기대감으로 채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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