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업 실패로 워킹홀리데이가 종료 되었다
고기에서 얻는 단백질을 아몬드 우유 한 팩으로, 과일에서 얻던 비타민을 과일 대신 과일향 쥬스로 기분만 대충 때우며 지냈다. 평생 안 빠질 것 같던 볼살도 빠졌다. 어쩌면 이렇게 어른이 되고 있는 것 일지도 모른다. 도쿄의 장마철엔 매일같이 비가 내렸다. 같이 살던 친구는 방학을 맞아 한국에 돌아갔고 나는 아침마다 운동을 갔다가 카페에 가서 책을 읽었다. 밤이면 미뤄왔던 영화들을 봤다. 예전엔 별로라며 하품을 참지 못하던 비포선셋 시리즈를 연이어봤다.
마침 도쿄에 놀러온 친구와 유행하는 카페에 갔다. 만원이 넘는 팬케이크 가격에, 1인 1 디저트를 주문해야하는 불친절한 가게임에도 평일 낮에 가게 앞에서 비죽비죽 땀을 흘리며 30분 가량 기다리기까지 해야했다. 드디어 건내받은 팬케이크는 귀여웠다. 대체 이건 왜 이렇게 사랑스러운 존재인걸까. 마치 누군가가 색연필로 보드랍게 그려놓은 것이 종이 밖으로 튀어나온 것 같았다. 이 비주얼을 위해 유리창 안 주방의 누군가는 단 한순간도 쉬지 않고 계란 흰자로 머랭을 쳐야했지만. 또 우린 각자 지갑에 든 돈을 탈탈 털어 귀여움의 댓가를 지불해야 했지만, 낫또를 반찬 삼아 끼니를 채우던 구린 날 중 소중한 포근함이 되어 주더라.
왠지 마음이 끌리지 않아
생일 당일에도 면접을 보았고 마음이 급해지자 하루에 두 개씩도 소화했다. 무역회사 한 곳과 물류회사 한 곳의 최종합격을 선고 받았다. 그렇게 안달하던 어딘가의 소속이 되는 일이었지만, 내겐 첫 출근일을 알리는 그 메일이 무슨 돌이킬 수 없는 큰 일처럼 느껴졌다. 나중에 이불을 차고 후회할 걸 알지만, 어리석게도 ‘왠지 마음이 가지 않는다.’는 하찮은 이유로 그만두기로 했다. 워킹홀리데이 비자는 정말 끝나가고 있었다. 아니 끝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마지막 날까지 구인광고를 뒤적이고 이력서를 수정하고 면접을 보았고 주말이면 푹푹 찌는 도쿄의 더위 속에서 호떡을 구웠다. 인터넷으로 취업 컨설팅 수업을 듣는 동안 너무 준비되지 않은 채 덤볐다는 생각에 오히려 무기력해졌다. 1차 합격자들끼리 모여 스터디를 진행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는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어렵게 잡은 2차 면접의 기회를 앞두고 마음이 차게 식었다.
따뜻하다 못해 뜨거운 철판 앞에서 심신을 녹여볼까. 자유자재로 모찌모찌한 반죽을 만지며 땀으로 온몸을 흥건히 적셔볼까. 몸이 바쁘면 마음이 진정될 지도 몰라. 힘을 다 쓰고 기진맥진 돌아왔다. 최종면접의 기회는 당연히 내게 오지 않았다.
일본 워킹홀리데이 종료
‘인간은 제한된 시간 속에서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존재’라는 말을 좋아하지만, 나는 불법체류자가 되기 전에 당장 이 땅을 벗어나지 않으면 안되었다. 판을 바꾸고 새 판을 짜야 할 때가 왔다. 짐을 하나도 정리하지 않은 채 도쿄에서도 쫓겨나왔다. 너무 크고 좋은 꿈만 꾸면서 허황된 이야기를 늘어놓은 건가 창피했다. 앞으로가 두려웠다. 그 주에도 하노이에 글을 무사히 넘겼고 비트코인의 시세를 눈여겨보고 귀 기울이고 있었다. 이렇게나 별 볼 일 없어보이지만, 호떡을 굽거나 접시를 나르는 일이 먹고 살기 위한 수단으로 여겨져 목표에 대한 개념부터 혼란을 겪곤 하지만, 이대로 굳건히 살아가야지. 폐기되는 워킹홀리데이 재류카드를 바라보며 왠지 모를 용기가 흘러 퍼지고 마는 것이었다.
낙농업을 추천한다
다양한 경험과 꾸준한 공부, 새로운 환경, 사람들과의 만남은 몇 살의 나이나 푼 돈에 연연하지 않고 더 깊은 것에 대한 고민을 하게한다. 카레를 좋아하는 나와 아티스트 덴섬은 만나면 늘 물어볼 것도 없이 카레를 먹으러 갔다. 여지없이 카레라이스를 찾아 앉은 가게에서는 추가요금을 면하려고 발끝을 예민하게 세우고 콩콩 피해 다녔다. 지극히 기본적인, 가난하고 절실한 우리를 닮은 카레라이스가 한 그릇 테이블 위에 얹어졌다. 결국 아무런 대책없이 다시 돌아온 나를 보며 엄마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셨다. 괜히 민망해진 나는 아니 고작 그 비자 받는데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너스레를 더해 떨었다. 엄마는 “니 인생이 어디서부터 그렇게 잘못되었는지 종이 한 장 꺼내어 적어가며 생각 좀 해 보라.”고 하셨다. 나는 내 인생이 익히지 않은 노른자와 흰 우유로 이루어져있다고 생각했다.
대학시절 친하게 지내던 언니는 작은 사업을 시작했다. 감각적인 언니의 센스와 경영이 잘 맞아들어 꽤나 잘 되는 모양이었다. 언니는 한결 부드러워진 표정이었다. 더운 밥을 한 끼 얻어먹었다. 우리 둘은 서로 견줄 필요도 없는 지독한 짠내나는 사람들이었고, 주머니에 돈이 없는 것 보다도 뭔가를 애타게 갈구하느라 여유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끈기가 부족해서 돈도 자주 없었다.) 그래서 그 밥이 더 고마웠다. 언니가 마음이 편안해지고 눈은 반짝이는 사람이 된 것처럼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기쁨이 되어 솟아나는 밥이었다. 앞으로 무슨 일을 하던 그 자리에서 꼭 밥값을 하길 바랐다. 값을 치르고 한 입 가득 밥을 씹어 넘기고 뜨끈한 밥심으로 또 다음 끼니를 먹을 수 있을 밥 값을 한다면 그걸로 당당할 수 있지 않을까.
무슨 동앗줄을 잡으면 좋을까요
“끈 놓지 말고 꼭 붙들고 있어. 그러면 뭐라도 된다.”누군가 말했다. 힘이 턱 빠지는 말이었다. 내가 쥐고 있는 끈은 매번 내 손가락 사이로 주르륵 빠져나갔다. 애초에 끈이란게 있었던 적이 있었는가 허무한 마음에 싱숭생숭해져 잠도 오지 않는 밤도 있었다. 청춘과 열정이라는 찬란한 단어들은 20대의 끝에 내몰린 내게, 가지고 싶지도 않은데 억지로 안겨져있었다. 어수룩하게 그 상황이 지나가기만을 엉거주춤 서 있었다. 그 날의 대화에는 프랑스에서 제빵 유학중인 동갑내기 남자가 올랐다. 늦깎이 새내기가 되어 비싼 파리의 물가와 학비까지 대느라 얼떨결에 빚더미에 앉게 생겼지만, 그래서 더 악바리처럼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작은 순간까지 다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고 노력한다는 사람. 청춘의 열정이라는 말이 너무나 잘 어울리는 아름다운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부럽고 부끄러운 마음에 나는 어쩔 줄을 몰랐다.
껄렁껄렁한 쫄보
“서형이는 커서 뭐가 될래?” 누가 물으면, 어린 시절 나는 되는 대로 “경찰관이요.” “저는 과학 선생님이 될 거에요.” 좋아하던 원숭이까지 들이밀며 꿈에 대한 대답을 만들었다. 보고 있는 세계가 작았을 것이고, 당시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을 떠올리거나 친한 친구의 대답이랑 비슷하게 맞추어 말했을 것이다. 다음 명절이나 행사 때 만난 어른들은 “너 원래는 외교관 된다고 했었잖아.” “너 서울대 간다고 했으면서.” 처럼 기억도 가물가물한 내 대답들을 되새겨주셨다.
더 이상 어린이가 아닌 때부터, 눈이 벌게질만큼 교실에 들어서기 직전까지 머리에 단어를 쑤셔 넣었으면서 “나 공부 하나도 안했어. 어떡해? 오늘 시험 망할듯.” 같은 거짓말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열심히 했다고, 오늘 시험은 내게 꽤나 중요하다고 말해버리면 시험점수가 훌륭하지 않을 때 친구들이 나를 머리가 나쁘다고 할까봐 걱정했다. 최선을 다한 내 모습이 멋쩍어지는 게 싫어서 뭐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말해버리는 일을 조금은 그만뒀다. 껄렁껄렁 딴청 부리면서 설렁설렁하다가 “아 별로 하고 싶은 일이 아니어서. 진지하게 생각한 길이 아닌걸.” 이라고 돌아서 버리면 또 그만이니까. 마음이 약해서, 상처 받을 내가 불쌍했고 자존심이 강해서 상처 받을 상황을 어떻게든 피하고 싶었다.
한 달 전, 도쿄에서 종합상사 면접을 같이 보고, 방송을 타고, 최종면접까지 함께 갔다가, “와. 우리 도쿄 오피스레이디 되는거냐. 아시아 물류 중심되는 거 아니냐. 긴자 바에서 퇴근하고 나면 묶은 머리 샤라락 풀면서 칵테일 마시고 그러는거냐.”며 김칫국을 마시던, 그리고 나란히 탈락의 고배를 마신 친구와 연남동에서 만나 즉석떡볶이를 먹었다.
“아니 왜 자꾸 사람들은 취업 안하고 있으면 뭐하고 싶냐고 물어보냐고. 난 아무것도 안하고 싶다고.”
조롱금지
하지만 알고 있다. 그런 삶은 외롭다. 도전했다가 잘 해내지 못해서 쪽이 팔릴 바에야 아무것도 안하는 편이 낫다고 스스로 합리화하고 있는 나지만, 좀처럼 발을 떼지 못하는 나를 볼 때면 더없이 볼품이 없다. 이대로 산다면 어떤 소중한 경험도 그 아무런 결과도 진짜로 얻어낼 수가 없다. 진심을 다하지 못한 인생을 마지막까지 살게 된다면 너무나 허무하고 쓸쓸할 것이다. 죽을 힘을 다하는 일은 정말이지 중요하다. 내가 다시 어떻게 몸을 일으키게 될지 모르지만, 나는 다시는 열심히 하는 사람을 비웃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철없는 고등학생 시절 빽빽한 친구의 노트를, 눈에 불을 켠 채 필기하는 모습을, 그 결과로 나온 모의고사 점수를 조롱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젖먹던 힘을 쏟아가며 결과가 어떻든 열심히 하는 사람은 존경받아야 한다. 그는 “쟤 왜 저렇게 목숨거는거야?” 라는 말을 듣는 일에 대한 두려움을 그는 극복했기 때문이다.
나는 무비자로 관광객처럼 3개월의 기한이 주어진 채 다시 동경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어느덧 코앞까지 온 가을을 맞아 츠쿠바 산을 오르기로 했다. 약속시간에 한 시간이나 늦은 나를 닥달하지도 않고 지하철 역에 아무렇게나 털석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친구가 이 날의 동행자였다. 그는 도쿄 외곽에서 설계직으로 일하고 있었고 최근 가죽공예에 대한 꿈이 생겨 회사를 다니면서 시간을 쪼개 가죽을 처음부터 배우고 있었다. 처음으로 만들어 보았다는 핑계가 귀여운 책 커버를 그가 읽던 책과 함께 선물 받았다. 버스를 타고 초록빛이 가득한 곳에 내렸다. "케이블카가 있지만, 타지 말자. 인생 쉽게 가면 재미가 없는 거야. 힘들게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가야 정상에서 더 많은 걸 느낄 수 있는 법이지. 땀은 거짓말하지 않아."
낭만적이지만 조금 진부한 표현을 달고 사는 그는, 담백한 낭만이 풍겨졌다. 어렵게 산을 오르면서 자연 속에서, 산에서, 수 백년을 같은 자리에서 묵묵히 견뎠을 아름드리 나무 앞에서 내 욕심이란 얼마나 부질없고 보잘것 없는 것인지 느꼈다. 그러나 그 애 입에서 같은 소감이 나왔다. “아니야. 난 백 년도 못 살거니까 조바심도 내고 쉬운 길은 없나 잔머리도 굴리고 그럴 수 있는 거지. 뭐 어때.” 라며 나는 금새 딴청을 부렸다. 늦게 출발한 탓에 정상에 오르자 해가 지고 있었다. 빗방울이 떨어질 듯 했고, 배도 고팠고, 무엇보다 내려갈 생각에 한숨이 나왔으므로 내려가는 케이블카를 탔다. 발로 꼬닥꼬닥 걸으며 인생을 배우겠다더니. 케이블카는 생각보다 더 재밌고 아찔하고 조금은 무서웠다. 다시 땅으로 내려간다면 어떤 인생을 살아가야하나. 유리 밖의 풍경이 수려해서, 창문에 붙어선 어린 세 자매가 귀여워서 너무 빠른 속도로 땅으로 돌아가고 있어서 눈물을 찔끔거렸다. 어이없지만 친구의 눈에도 눈물이 그득하게 고여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