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의 고수는 일단 싸움판에 뛰어들어 칼을 부딪히며 날을 간다
너무 급하게 내린 결정은 아닌지, 부모님은 이 일을 아시는지, 가만히 내 마음을 들여다볼 시간을 충분히 가졌는지, 퇴사를 만류하는 회사의 이야기에 멈칫했다. 부지런히 한 자리에서 실력을 갈고 닦는 친구들을 떠올리니 이내 스스로가 또 실패를 겪고 있는 보잘것없는 사람이 되는 것 같아 머뭇거려졌다. 고민은 몇 주에 걸쳐 계속되었지만 그럴듯한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 시간은 결정을 미루기 위해 시간을 버는 변명이 되고 있는 것 같았다.
언제든 떠날 수 있다는 책임감없는 생각은 오히려 매 순간 충실한 현재를 만들기도 한다. 바람이 살랑살랑 앞머리를 간지럽히는 날에는 고개를 탁 치켜들자. 신발끈을 질끈 묶고 어~디서 이~ 바람이 불~어오는지, 산 너머인지, 바다 건넌지 찾아나서자. 결정을 탁 내리고 나자 행동하는 일만 남았다. 질척이던 고민이 끝나고 매끈한 앞날아, 펼쳐져주라.
마지막 월급을 미처 받지 못한 채, 한국으로 덜렁 넘어왔다. 도쿄에 갈 때 나는 15kg의 캐리어를 끌고 10kg의 배낭을 매고 있었다. 일 년 반을 일본에서 지내고 다시 인천행 비행기를 탄 내겐 고작 11kg의 짐 뿐이었다.
금속 공예학과 1학년 친구가 가방 만드는 선배의 졸업 전시 작품에 참여했다. 여성 가방의 잠금 장치 부속품을 만들었는데, 친구 집에서 이미 본 적이 있었다. 선배를 맥이겠다는(?) 의지인가, 졸업생에 대한 실례가 아닌가 생각이 드는 쇳덩이였다. 그러나 전시회의 밝다 못해 눈이 시린 조명 아래에서 친구의 돌덩이는 날카롭게 빛났다. 가방을 돋보이게 하는 것을 넘어 주인공 포스 마저 내고 있었다.
무협지에서 고수들이 칼을 가는 장면은 좀처럼 등장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들은 일단 싸움판에 뛰어든다. 상대의 무기와 쨍그랑 소리를 내며 한바탕 칼을 움직일 뿐이다. 머뭇거림도 두려움도 없는 그 과정에서 칼은 어느새 짜릿하고 또 날렵하게 갈아지는 것이다.
어렵고 막막하더라도 시작하는 일은 스릴있다. 그러다 죽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봐야 죽기밖에 더하겠냐는 대사를 덧입혀본다. 기회는 엄마가 열어주는 것이 아니다. 아빠 돈을 빌려서 할 수 있는 것도, 친구랑 같이 잡으러 다닐 일도 아니다. 그러나 한 번에 잡지사 에디터가 되어 일을 하면서 실력을 만들어보려는 계획은 실패했다. 경력이 부족하여 서류에서 번번히 탈락했고, 겨우 만든 면접 기회도 버벅대다 날려먹었다.
나는 실망과 좌절을 인내하는 법을 배우는 것 자체가 창조적인 사람에게 배당된 일의 일부라고 늘 생각한다. 만약 당신이 어느 분야건 예술가가 되고 싶다면, 나에겐 ‘당신이 자기 좌절감에 어떻게 대처하느냐’하는 문제가 곧 당신에게 주어진 예술 작업의 본질적인 측면으로 보인다. 좌절감이란 당신의 창조적 작업과정에 끼어드는 훼방꾼이 아니다. 좌절감이란 바로 그 과정의 일부다.
- 빅매직
“뭐야, 이번엔.”
“잡지 만드는 편집자가 되려고요.”
“우리나라 종이 잡지들 다 망한지가 언젠데. 그거 진지하게 하는 거냐?
“네.”
나는 매번 진지하다. 결국 다시 돌아올 거면서 애초에 왜 떠나느라 난리를 피웠냐고, 이것 보라고, 이렇게 다 부질없는 거라는 말 앞에서 장난스럽게 어깨를 으쓱 들어올려 보였을 뿐이지만 이번에도, 이번에 또 나는 진지하다. 후회할지도 모른다. 후회하겠지. 깔깔거리며 보는 미국 시트콤 빅뱅이론이, 따뜻하게 데운 오트밀 한 그릇이, 쾌적한 헬스장에서 땀 흘리고 뜨거운 물로 하는 샤워가, 엔화로 받는 넉넉한 월급이. 인생에서 ‘이건 절대 빠질 수 없다.’하는 게 있냐고 묻는다면, 정말 당당하게 바로 말할 수 있는 항목이 내겐 있다. ‘그걸 위해 뭘 포기할 수 있냐’고 묻는다면, 거의 대부분의 것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아무도 물어봐주지 않겠지만.) 여태까지 천연덕스럽게 괜찮은 선택지를 추억으로 박제해 온 것 처럼 도쿄 역시 내게 멋진 훈장으로 가슴에 남게 될 것이다. 그거면 될 일이다.
어떤 일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누군가 고민할 때 나는 무조건 해보라고 권하는 편이다. 외부의 사건이 이끄는 삶보다는 자신의 내면이 이끄는 삶이 훨씬 행복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심리적 변화의 곡선을 지나온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성장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다면, 상처도 없겠지만 성장도 없다. 하지만 뭔가 하게 되면 나는 어떤 식으로든 성장한다. 심지어 시도했으나 무엇도 제대로 해내지 못했을 때 조차도 성장한다. 해보고 나면 어떤 식으로든 우리는 달라져 있을 것. 결과가 아니라 그 변화에 집중하는 것, 여기에 핵심이 있다.
- 소설가의 일, 김연수
모든 꿈의 시작은 0이다.
한 잡지사에서 운영하는 에디터 스쿨과 한국잡지교육원에서 진행하는 취재기자 수업에 동시에 지원했다. 취업 준비생으로 국가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지만, 출석 체크를 위해 반드시 개인 명의의 휴대폰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내가 가지고 있던 휴대폰은 일본에서만 쓸 수 있도록 컨트리락이 걸려 사용할 수가 없었다. 친구 집에 짐을 풀고 가진 돈을 털어 휴대폰을 구매했다. 지원금은 일괄 지급이라 네 달 뒤, 560시간의 교육을 마치고 받을 수 있다고 했다. 또 아르바이트를 하면 불법 수급자가 되므로 주의하라고 했다. 취업 준비생의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듯한 제도에, 아니 벼랑 끝에 혼자 세워둔 나에게 화가 났다. 나만 돈 한 푼 아까워서 요란을 떨었다.
‘방황하며 자라야 방향을 잡는다’는 저널리스트의 글에는 원성의 댓글이 자자했다. 거, 있는 집 애나 그렇게 방황할 수 있는 거 아니요? 이것저것 손대다 내 길이 아니라고 뛰쳐나오는 것도 한 두 번이고 부모님이 기다려주시는 것도 하루 이틀일텐데, 가진 거라곤 글 쓰는 걸 좋아한다는 장점 밖에 없는 내가 선 이 자리에는 심지어 글 좀 쓴다는 아이들이 모두 모여있었다.
이럴 때 일수록 내가 왜 자신의 관심사를 좀 더 명료하게 시각화할 필요가 있다. 교육원에서 내준 숙제를 하며, 왜 내가 잡지를 만들고 싶은가를 구체적으로 정리해 나갔다. 관심사를 고려하여 지속적으로 작업을 했을 때 나만의 개성이 표현된다. 저런 사진은 카메라만 좋으면 누구나 찍을 수 있는 것이고, 저런 일상적인 내용을 담은 에세이는 나도 쓸 수 있는 것이지만, 그 일을 만들어 나가기까지의 추진력은 자신의 관심을 잘 들여다 본 사람에게서 나온다. 모든 꿈의 시작은 0이다.
금새 마음까지 가난해져 바닥을 드러냈던 나는 여러 도서관을 바꿔가며 책만 잔뜩 읽어댔다. 4900원 순댓국을 먹고 가게에서 주는 커피를 마시고 벤치에 앉아 눈 내리는 것을 구경하다가 집에 들어와서 다시 책을 들여다보는 일상적인 것들을 하면서 마음은 천천히 풀려나갔다. 열정적인 사람이 자유로울 수 있다고 여전히 믿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