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한잔 해요 대신 커피 마셔요

편집자가 이별의 기억을 편집하는 법

by 조서형


수업을 듣고 시간에 쫓겨가며 숙제를 제출하다보니 어느덧 날씨는 물씬 봄을 품었다. 그리고 고작 2주 남짓한 시간에 어떤 중요한 사건들은 날 빠르게 오고갔다. 이렇게 일을 주섬주섬 수습하고 그 이야기를 글로 쓸 수 있게 될 줄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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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자면 나는 어떤 남자에게 첫 눈에 반했다. 나는 저돌적으로 들이댔다. "일 마치면 기다려줘요. 같이 맥주 한 잔 해요." 막걸리를 병 째 휘두르게 생긴 그는 뜻밖에도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했다. 그럼에도 나는 꾸역꾸역 저렴한 맥주를 파는 이자카야를 찾아 들어갔다. “혼자 마시긴 그러니까 같이 마셔요. 여기 맥주 두 잔이요.” 깔끔하게 안주 없이 생맥주 한 잔씩을 마시고 나오는 그 길에 우리는 손을 맞잡고 있었다.
나는 이런 식으로 거의 항상 그보다 앞에 서서 성질 급하게 또 정신없게 굴었다. 그는 들볶이면서도 여유롭고 장난기 섞인 웃음을 생글생글거렸다. 가끔은 내가 내 속도감에 겁을 먹는 일도 있었다. 어떤 날엔 무서워서 엉엉 울었다. 울다 옆을 보니 그는 초조하게 비닐봉지를 부스럭대고 있었다.

"TV에 나오더라구. 이렇게 하면 비닐 소리에 심리의 안정을 찾고 울음을 멈출 수 있다고." 그 애는 그런 사람이었다, 엉뚱하고 또 순수한.
나는 세상의 이해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강렬한 호기심을 가지는 동시에 답답해했다. 많은 것을 들쑤셔놓고 맘처럼 되지 않는다고 속상해하는 일이 많았다.


"드디어 꿈을 찾았는데, 막상 돈 생각을 하면 회사를 그만 둘 수 없어. 너무 비참해. 나란 인간은 형편없어."

"아냐. 상황은 그렇게 나쁘지 않아. 너와 난 행운이거든. 들어봐. 난 보컬이고 넌 글을 쓰잖아. 보컬은 음악하는 사람 중 가장 돈이 덜 들어. 악기가 필요 없거든. 넌 작가지. 예술 중에 붓도 물감도 카메라나 거대 도구나 장비 아무것도 필요없이 연필과 종이만 있으면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어? 걱정할 것 아무것도 없어."


"나 살쪘어. 너무 기분이 나빠."

"응. 뚱땡이 됐네. 하지만 뚱땡이는 절대 기분 나쁜 일이 아니야."


나는 그와 보내는 시간이 좋았다. 그와 같이 있기 위해 술 대신 커피를 마시는 날이 많았다. 흥분해서 여러가지 이야기를 하기 보다 자주 가라앉아 생각에 잠기곤 했다. 얼굴을 마주보고 요상한 음악을 들었다. 손을 잡고 어깨 동무를 하고 걸었다. 헬스장에 가서 벤치프레스를 하고 누가 입다 내 놓은 구제 옷을 사 입었다. 편의점에서 오뎅을 가득 사 와 저녁으로 먹고 후식으로는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쉬는 날엔 미국 드라마 <빅뱅 이론>을 몰아보고 유치한 일본 공포영화를 보며 호들갑을 떨었다. 소소한 성공을 축하하고, 서로의 생활 습관에 잔소리를 늘어놓고, 정성 담긴 요리는 놀렸다.

인연이 다하여 그 남자와 나의 꿈엔 더 이상 함께의 모습이 그려지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뭐랄까, 음, 그 대신 떠올리는 것 만으로도 귀여워서 웃음이 지어지는 구남친을 가지게 되었다. 그와 친해지고 싶다면 "술 한잔 해요." 보다는 "커피 마시러 갈래요?" 가 나을 것이다. 언젠가 다시 그와 친해지고 싶은 날이 온다면, 커피 잘 하는 집을 미리 찾아 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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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만날 수 없게 된 사람을 떠올리며 울적해 하는 일을 빨리 정리할 수 있었던 데는 단연 새로운 인연이 큰 몫을 했다. 나는 그래픽 디자인 매거진의 에디터가 되었다. 교육 과정을 채 마치기도 전이었다. 3개월의 수습 과정 동안에는 월급이 적어서 주중에는 곱창집에서 주말에는 게스트 하우스에서 청소를 하며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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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은 일은 어느 순간 불쑥 떠오르고선 또 어느 순간이면 이유도 말해주지 않고 토라져 버린 단짝 친구처럼 고개를 돌리기도 했다. 그 탓에 분명 나는 ‘잘 사는 일’이 미루어지고 있는 듯 했다. 경력이 쌓여 월급이 오르긴 커녕 번번히 신입이었다. 그렇지만 큰 손해와 희생이 반복되다 보니 어느정도 많은 걸 바라지 않게 되는 변화가 생겼다. 이는 뜻밖의 좋은 점을 더 많이 발견할 수 있도록 한다. 틈틈히 아르바이트를 하며 잡지를 만드는 일은 좋았다. 내가 일을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 좋았다.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평온한 삶을 살고 싶었지만 결국 또 나는 다시 기를 쓰며 살게 되었다. 더 이상 못 달리겠다고 생각했을 때 한 바퀴를 더 달리는 것이, 더는 힘이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을 때 한 번 더 봉 위에 턱을 걸어보는 것이, 더 마시면 죽을 것 같을 때 한 잔을 더 마시는 것이 실력을 늘리는 방법일 거라고 다시 믿게 되었다. 나는 그렇게 가진 에너지를 다 썼다고 생각했을 때 한 번 더 용을 쓸 수 있는 일을 하는 게 좋았다. 내가 어디에 있건 내가 좋아서 선택한 일에는 불만을 품을 수 없었다. 불만이 생기면 내가 떠나면 될 일이었다. 어차피 세상에 어떤 어려움도 없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 일이 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도 없다. 어려움이 모든 삶에 공평하게 부과된다고 생각하면 더더욱 좋아하는 일을 하게 된 오늘이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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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다니게 된 회사는 5인 이내의 작은 기업이었고, 서울 어느 구석진 동네에 오피스텔을 빌려서 쓰고 있었다. 월급은 최저시급을 겉돌았지만 같이 일하는 사람들의 눈은 반짝반짝거렸다. 퇴근하면 아르바이트를 하고 주말이면 또 다른 아르바이트를 해서 생활을 이어나갔다. 앞으로의 계획을 묻는 한 그래픽 디자이너와의 인터뷰에서는 “잘 모르겠다. 다만 예상 범주 밖에 있는 것이었으면 바란다.”는 대답이 나왔다. 어떤 것에도 갇히거나 얽매임 없이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아간다는 사람들은 이제 너무 많아 식상할 지경이지만, 그럼에도 ‘누구도 완벽한 인간이 아니니 시행착오는 당연한 것’이라 생각하고 스스로를 괴롭게 하지 않는 사람들은 정말 있다. 가끔 발견되는 그 사람들을 보며 나는 시행착오를 너그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마음의 연습을 한다. 그들은 다른 사람이 세워 놓은 질서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질서를 발견한다. 나는 그것이 정말 자유일 거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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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족한 거 보단 가난한 게 낫다고 생각해. 진정성, 모든 건 진정성에 달려있어. 관찰자가 되어야해. 좋은 눈을 가질 수 있어야해. 사람은 늘 변해야 해. 아침에 애들을 깨워 학교에 보내면 선생님들은 애들을 재워. 아이들의 시간을 지루하게 만드는 어른이 되어서도, 재미를 찾지 못해 엎드려 잠을 자는 학생이 되어서도 안돼.' 그런 ‘진짜 자유’의 사람들을 만났을 때면, 술을 못 먹으면서도 술자리를 떠날 수 없었다. 어두침침한 술집에서 얼큰하게 취한채로 노트에 받아적는 이야기들은 도무지 겹치고 구부러져 알아볼 수가 없었다. 술 기운에 어지러워하면서도 적고 싶은 이야기는 아주 많았다. “아니. 뭘 받아적냐? 놓치면 어쩔 수 없는거야. 놓쳤지만 그게 만약 너의 운명이라면 다시 돌아오게 되어 있어.”

될 일은 어차피 되게 되어 있다고 말하지만, 단순하게 생각하고 걱정을 줄이면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하지만, 내게 고민이 없는 건 생각이 없는 것이고, 사는 재미도 없어지는 일이나 마찬가지다. 나를 살 빠지게 하는 것을 사랑하는 경향이 있다. 노력하고 신경쓰지 않으면 절대 살이 빠지지 않는 체질의 나는 나를 안심하고 살 찔 수 있게 하는 것들을 금새 깔보게 된다. 끊임없이 적고, 기록하고, 생각하고, 고민하게 하는 곳이 지금 내가 있을 곳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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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를 요청하는 전화를 간단히 거절당하고,
자식뻘 되는 어린 아티스트에게 존댓말로 인터뷰를 하고,
먼 곳까지 취재하러 갈 교통비가 걱정되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40년 전의 상황과 똑같아 보일지 모르지만 달라진 점도 있다.
그 때보다 체력은 떨어지고 수입은 줄어드는데 고생은 더 늘었다.
그래도 좋다. 돈보다도 매일 느껴지는 두근거림이 소중하기 때문이다.
편집자로 사는 사소한 행복은 출신 학교나 경력, 직함, 연령, 수입과는 상관없이
호기심과 체력과 인간성만 있으면 결과물이 나온다는 점에 있다.

- 권외편집자


유행가만 트는 DJ도 없지만 아무도 모르는 음악만 트는 DJ도 없다.
그러니까 유명한 곡과 그렇지 않은 곡을 적절히 섞고 때로는 장르가 완전히 다른 음악을 넣어서 전개를 예상할 수 없도록 하면 플로어는 금세 뜨겁게 달아오른다. 그렇게 자신의 세계관을 확장해가는 일은 DJ에게도 편집자에게도 무척 중요하다

- 권외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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