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의 동굴 속에서

과테말라

by 조서형

# 0 거기가 어딘 줄 알고 가.

이번 여정은 특별할 것 없던 하노이의 한 술자리에서 시작되었다. “나, 일 그만두고 과테말라나 갈까봐. 거기서 스페인어 수업이나 몇 달 듣고…” 회사원들의 대화 속 무심하게 던져진 도시 안티구아는 그렇게 내 가슴 속에 새겨졌다. 그리고 1년이 조금 더 지난 어느 이른 봄, 나는 그 대리님께 뜬금없이 연락을 드렸다. “저 이틀 뒤에 과테말라 안티구아에 가요. 기억 나시죠? 저한테 얘기해주셨던 거.”

“…응? 미쳤구나 너. 거기가 어디라고 진짜 가.”



# 1 스페인어가 배우고 싶었다면

돌아보면 나는 스페인어를 배우고 싶어했다.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나라가 영어를 쓰는 나라보다도 많다는 점에 매력을 느꼈고, 주로 사용하는 국가가 중남미에 모여있다는 점에서 더 신비롭게 느껴졌다. 미지의세계에 가까워지고 싶어 스페인어 전공을 지망했다. 무역학도가 된 스무살의 나는 여전히 중남미 국가에서 무역업을 통해 가능성을 발견하고 싶다고 얘기하고 있었다. 그동안 나는 급한 불 끄는 일과 늘어진 하루 보내기를 반복하다가 몇 년이 채 지나지도 않은 꿈을 기억도 못하고 있었다.

대학 졸업 후 정식으로 취업을 한 2015년의 나는 열정에 불타 덤비듯 일했다. 인정받고 싶은 마음에 스무 시간씩 욕심부려 일하기도 했고, 쉬는 날이면 유행하는 책을 읽고 유명한 전시회를 찾아다녔다. 뭔가를 하고 있으나 이상하게 늘 불안했다. 목표의 종류를 늘려갔고 다이어리에 체크 표시를 더 하기 위해 세세한 일들까지 적어나갔다. 놓치고 싶은 게 없었고 모두 잡으려 할 수록 나는 엉망이 되어갔다.

집 앞 카페에서 출근 전 라떼를 주문한 동시에 분주하게 메모를 뒤지고 있었다. 방금 내린 핸드드립이라며 바리스타님이건 내주신 머그에는 묵직한 바디감에 초콜릿 향을 머금은 과테말라 안티구아가 담겨있었다. 애써 외면하고있었지만, 나는 길을 걷다가도 갑자기 울고 누구를 만나기 조심스러울 만큼 예민한 상태였다.

버리기 뭐해 서랍장에 넣어 둔 일기장처럼, 버리기 뭐해 가지고 있던 내 이야기를 이제서야 들어주기로 했다. 표를 끊고나니 지인들과 미처 작별인사를 나눌 시간도 없었고, 사전지식이 부족했던 탓에 비자가 문제되기도 했다. 이륙하는 순간까지내 머릿속은 정리되지 않은 상태였다. 긴 비행시간에 내내 잠에 취해 헤롱거렸고 그 와중에 어떤 시작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이해없는 세상에서 나만은 언제라도 네 편인 것을 잊지마라. 세상은 넓다. 너를 놀라게 할 일도 많겠거니와 또 배울 것도 많으리라. 축복한다. –이 상



# 2 영원한 봄의 도시, 과테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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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테말라 시티에 내린 나는 안티구아까지 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한 시간 쯤 지나 자갈사이를 덜컹대며 굴러가는 게 느껴졌다. 고개를 들어보니 알록달록하게 칠해진 집들 사이로 형형색색 수놓아진 옷을 입은 사람들이 보따리를 매고 걸어다녔다. 안티구아는 인디언과 여행자로 구성된 독특한 분위기를 가진 도시다. 편의시설과호스텔이 많아 사전에 꼼꼼히 계획을 세우지 못한 여행자들에게도 호의적이다. 길을 걷다보면 호객꾼들이끊임없이 나를 불러 세운다. 스페인어 수업이나 투어 신청, 버스예매, 맛집까지 그들은 모든 걸 알고 있기 때문에 다소 경계심을 풀고 다가가는 것도 좋다. 연중 내내 따뜻하고 선선한 날씨를 가진 과테말라는 ‘영원한 봄의도시’라는 사랑스러운 별명을 가지고 있다.

멕시코와 국경을접한 과테말라는 스페인어를 배워 중남미 여정을 시작하는 여행자들의 허브역할을 한다. 시간 당 $5~10 정도의 가격으로 1:1 스페인어 수업이 진행된다. 학원과 자신의 숙소 중 장소를 결정하고 여의치 않다면 카페나 공원에서 공부하기도 한다. 하루에 네 시간 이상의 긴 수업이 특징이며 짜여진 프로그램이나 교재가 따로 없는 경우가 많다. 한 달 이상 지낼 생각이라면 발품을 팔아 가격과 수업방식을 신중히 결정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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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식민지시절, 안티구아는 과테말라, 멕시코, 엘살바도르, 온두라스, 니카라과의 수도 역할을 했다. 여러 차례에 걸친 화산 폭발과 지진으로 이제는 이전의 영광을 잃었지만 역사를 간직한 도시로 세계 문화 유산에 등록되어있다. 자연재해에 무너진 건물들은 복구 되지 않아 녹아내리고 부서진 그 때의 순간을 여과없이 보여주어 도시 자체가 커다란 박물관 같다. 3층 이상의 높은 건물이 없어 옥상에만 올라도 시내가 내려다 보인다. 마을 뒷산인 ‘십자가 언덕’은 안티구아 전체가 한눈에 펼쳐지는 곳으로 현지인과 여행객들 모두가 좋아하는 곳이다.

안티구아의 명물중에는 특이하게 ‘맥도날드’ 가 있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햄버거 매장으로 손꼽히는 이 곳의 정원에서는 구름 모자를 쓴 거대한 아구아 화산을 감상할수 있다. 맥카페의 ‘과테말라 안티구아’ 콩을 이용한 커피 역시 여행자들의 호기심을 충족시킨다.

화산지대의 토양에서 자란 좋은 품질의 커피 콩은 안티구아의 가장 인기있는 상품이다. 골목골목 훌륭한 로스터리 카페들이 숨겨져있다. 괜찮은 열매는 미국과 유럽등지로 먼저 수출되기 때문에 현지인들은 네슬레 인스턴트 커피를 주로 마신다고 하지만, 카페를 추천해 달라고하면 기꺼이 도와줄 것이다. 커피를 즐겨 마시지 않는 사람이라면 ‘초콜라떼’ 를 마셔보는 것도 좋다. 최초로 카카오 열매를 먹기 시작한 마야민족의 자부심이 담긴 신의 음료를 맛볼 수 있다.



# 3 평생 나 자신을 떠나지 않는 사람은 자신 뿐이다.

하루에 다섯시간씩 수업을 듣고 오후에 거리를 서성이는 것 외에 내겐 아무런 일도 없었다. 가지고 있던 돈을 한꺼번에 두달치 수업료와 생활비로 지불했기 때문에 다음 일정을 고민할 일도 없었다. 내가 지내던 곳은 중심가에 위치한 저렴한 호스텔이었다. 늘 여행자들로 북적였지만 다들 이틀이면 배낭을 다시 챙겨 떠났다. 운명의 연인이 나타나거나 소울메이트를 만난다거나 엄청난 비밀을 알게된다거나 하는 사건이 생기지도 않았다. 텅 빈 하루가 자유롭게 느껴지던 것도 열흘 쯤 지나니 시간이 더디게 느껴졌다. 한국친구들과 채팅을 하고 노트북을 켜서 영화를 보다가 침대에 엎드려 “심심하다..”고 중얼거리는 내가 한심해지기도 했다. 큰 고민없이 지구 반대편까지 단숨에 날아온 나였지만 나도 모르게 뭔가 대단한 일이 벌어지길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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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스페인어 수업을 듣고 매일 시장 구경을 갔다. 서툰 실력이지만 인사를 나누고 과일이나 야채를 조금씩 사기 시작했다. 남들이 내는 돈을 잘 지켜보다가 적당한 가격에 사는 팁도 생겼다. 신선한재료를 정성 들여 손질하고 긴 시간 더듬더듬 서툰 요리를 한 다음 그릇에 예쁘게 담았다. 햇볕이 드는곳에 앉아 조금씩 떠서 한참을 우물거리며 씹었다. 대충 편의점에서 사 먹던 김밥이 생각났다. 바빠서 저녁은 거른 날에는 퇴근 후에 동료들과 술집에서 기름지고 매운 안주들로 배를 채웠었다.

그러고 보니 그동안 나는 사람들이 내 편이 되어주길 바랬다. 혼자 할 용기가 없었고 혼자서도 의미있게 시간을 보내는 방법을 몰랐다. 사람과 일에 치여 힘들어한다고 생각했지만, 또내 곁에서 사라질까봐 무서워 하고 있었다. 외로움은 내게 공포심에 가까웠고 그 저항감을 승화 시켜내고 싶었다.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고 아무도 날 찾지 않는 곳에서 삶의 균형을 찾으려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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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일정을 맞춰 함께 여행을 다니고 있었고 거의 항상 그들이 부러웠다. 무리지어 다니던 때가 여전히 그리웠다. 타인의 시선이나 타이틀에 신경쓰지 않는 줄 알았지만 모든 게 벗겨진 내 맨몸은 거의 단련되어 있지 않았다. 스페인어 공부에 몰입하며 이겨내보려고도 했다. 현재, 현재진행, 단순 과거, 과거진행, 대과거, 완료과거, 명령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시제에 듣는 사람에 따라 여섯가지로다시 동사를 바꿔가며 말해야하는 스페인어는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언어공부를 하다보면 평소에 쓰던 단어의 어원을 발견하는 순간이 있다. 내 몸과 생각을 지배하는 습관은 ‘아우라’라고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각광받고 있는 단어인 열정은 영어로 ‘Passion’이며 고대 그리스어의 ‘고통스럽다, 괴롭다’는뜻에서 왔다. 고통과 고독을 이겨내고 진정한 열정을 찾는다면 스스로 아늑하고 우아한 아우라를 뽐내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는 걸까.

배웠던 것들을 중심으로 각자의 강점을 철저히 강화하는 일이 적자생존의 세계에서 살아남는 길인 줄 알았다. 새로운 게 배우고 싶은 건 ‘남의 떡이 커 보이는’ 순간의 심보이므로 ‘한 우물을 파는 데’만 성공이 있는 줄 알았다. 지구 반대편에서의 시간은 그동안의 세계를 무너뜨리는 작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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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 속 거의 모든 것이 벗어났으며 블로그를 뒤져서도 미리 알 수 없는 일들이 벌어졌으며 많은 것이 불편하게 느껴졌다. 100일을 동굴 속에서 보낸 단군을 생각하며 그 고독함 속에서 나다움을 발견하고자 애썼다. 오버스럽지만 생경한 장소에서 내 안의 숨겨진 내 길을 모색하는 위대한 여정이라고 스스로 의미를 부여해가며 고독을 고독고독 씹었다.


이미 떠나와 버린 길에서 곁에 있어줄 사람은 나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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