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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너지드링크 Apr 19. 2024

법인카드로 작가의  싹을 키웠다.

그때 그 시절

첫 직장에서 나는 가장 말단 사원으로 입사했다.

전공을 살려 석사 학위 간 것이 아니고 일반 회사에 간 것이라 신입일부터 시작했다. 명함에는 마케터라고 쓰여있지만 복사하기, 생수통 나르기, 생수통 끼워넣기, 손님 오면 커피 타서 응대하기 등이 내 일에 포함되어 있었다.

믹스 커피 물 조절은 지금도 잘 못하는데 그때도 한강처럼 국을 만들어서 대접했더니 어느 순간은 전무님이 직접 타먹기도 하더라는..ㅋㅋ

그리고 또 하나 나의 주 임무는 전무님이 쓴 법인카드를 정리하고 비용처리를 하는 일이었다.


법인카드란 것의 존재를 그때 알았다.

회식할 때 전무님 돈을 쓰는 게 아니라 각종 비용이 법인카드로 결제된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가끔 시장조사를 가서 샘플을 사야 할 때, 우리는 우리 카드를 쓰고 결제를 올렸는데 법인카드를 가진 상사는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법인카드를 쓰는 항목을 넣을 때가 가장 곤란했다.

(참고로 두부제품을 마케팅하는 부서에 있었다는 점)


'엥? 빵을 10만 원어치나 샀는데 이걸 뭐라고 쓰지?'

-> 제품 개발을 위한 재료 구입비


'식당에서 자기 가족끼리 밥 먹은 것 같은데 어떻게 쓰지?'

-> 신제품 개발을 위한 회의 및 시식비


'마트에서 그냥 생필품을 구입한 거 같은데 이걸 뭐라고 쓰지?'

-> 아이디어 발굴을 위한 시장조사비


어떤 항목을 갖다 붙여도 제품 개발 쪽으로만 포커싱을 하면 될 것 같아 나의 글짓기 실력은 나날이 늘었다.

더 승진하시고 상사에게 비서가 생기자 드디어 나도 이 일을 벗어나게 되었다.


그땐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생각 안 하고, 시키는 일만 열심히 했다. 사회초년생이라  뭐든 묵묵히 했던 듯.


되돌아보면 그때 힘들지만 재미있는 일도 많았고 아직도 웃을 수 있는 에피소드가 많다.. 내가 지금 글을 쓰는 건, 그때 법인 카드 항목을 작성하기 위해 키운  창작력 덕분(?)라고 애써 웃어본다.

설마  지금은 그런 일이 없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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