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가지고 온 업무노트를 시기별로 정리한 뒤 가장 오래된 노트를 꺼내 들었다. 첫 페이지부터 살펴보니 옛 생각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지금은 함께 하지 않는 선수들의 이름도 꽤 보인다.
2016년이면 전회사에 입사한 지 3년 차가 되는 해였다. 아마 대리 진급을 이 해에 했었던 것 같다. 노트를 살펴보다 눈에 띄는 페이지가 있다. 바로 결과보고서 작업을 위해 페이지별 플로우를 정리한 장이었다.
스포츠에이전트로 주로 하는 문서 작업 중, 가장 많이 하는 일이 바로 선수들의 '결과보고서' 일 것이다. 파워포인트나 워드로 혹은 엑셀로 정말 다양하게 담당 선수들의 결과를 리포트한다.
업무노트에 있던 페이지는 바로 유소연선수의 스폰서십 결과보고서였다. 유소연선수의 후원사에 보낼 내용이었던 것 같다. 작성된 플로우에 후원사 명이 없었던 것을 보니 여러 곳에 활용할 목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결과보고서들은 시즌을 마친 뒤, 선수들의 후원사와 그다음 해를 위해 재계약을 위한 후원제안서를 만들 때 2차로 활용되는 자료들이라 가능한 잘 준비하면 나중에도 도움이 된다.
결과보고서로 오늘 글을 시작했는데, 사실 내가 다룰 내용은 바로 '후원 제안서'이다. 그동안 스포츠 에이전트로 일하면서 정말 많은 제안서를 작성했었다.
보유한 선수들을 활용하여 제안을 해야 하는 위치에 있다는 환경 특성과 나름 제안서 업무에 자신이 있었던 탓에 노력을 많이 들였던 분야이다. 그리고 스포츠 에이전트가 스포츠마케팅을 하려면 꼭 필요한 업무이다.
그동안 내가 주로 작성했던 제안서들은 다음과 같다.
선수 후원(스폰서십) 제안서
선수 활용 행사(프로그램) 제안서
대회 운영 및 후원 제안서
신규사업 제안서
선수일을 주로 했지만 다른 일도 담당했기 때문에 대회나 기타 다른 제안서들도 많이 작업을 했었다. 대회 운영 입찰을 준비 중일 때는 여러 팀원들과 업무분장을 확실히 하고 긴 기간 사투를 벌였다.
위에서 잠깐 언급한 것처럼 대부분의 조직 내 업무구조 상 제안서작성의 업무들은 주니어들이 주로 한다. 나도 사원, 대리 시절까지는 팀의 모든 제안서를 거의 담당했었다.
거기에 대학생 때 제안서와 관련해서 들였던 노력들(마케팅동아리, 공모전 참석 등)이 위력을 발휘해서 입사 초기에는 꽤 인정을 받았었다. 그래서 더 욕심을 내기도 했다.
제안서 작성에 대한 가이드가 적혀있는 포스트 잇.
지금은 페이퍼워크 그 자체보다는 다른 일들에 더 우선순위를 두는 포지션인 만큼 함께 일하는 팀원들에게 최대한 가이드를 잘 주고, 결과물을 검토하고 받아서 외부로 뿌리는 비중이 많다.
어쨌든 오늘 이 글은 그동안 스포츠 에이전트로 일하면서 제안서를 쓰다가 내가 주니어 시절 겪었던 몇가지 시행착오를 적어보았다. 제안서로 어려움을 겪는 주니어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1. 제안서의 디자인보다 우선 신경 써야 할 것은 내용이다.
내가 대학생에서 회사원으로 넘어오면서 가장 고생했던 부분이다. 더 멋진 템플릿에 유려한 이미지들이 시선을 새롭자는 제안서가 더 훌륭하다고 믿었던 시기가 있었다. 그러다 보니 내용에 대한 고민보다는 어떠한 디자인을 슬라이드를 이끌어나갈지 시간을 더 투자했던 시기가 있었다. 학생시절에는 이게 조금 먹혔다.
그러나 비즈니스의 세계는 달랐다. 제안서의 가장 첫 번째는 제안하는 내용, 그리고 논리였다. 디자인은 깔끔하면 된다. 제안하는 내용을 해치지 않을 정도의 선(Line) 활용, 텍스트 크기 조정, 톤에 맞는 적절한 색깔의 활용과 누끼를 따서 깔끔하게 활용된 이미지 정도면 된다. 더 중요한 것에 집중하자.
2. 어떤 상황에서 전달하는 제안서인지 확인하는 습관을 들이자.
팀의 주니어들이 제안서를 작업할 때는 대부분 선임들의 업무 요청으로 제안서를 작업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선수 후원 미팅을 마치고 돌아온 선임이 A사에 우리 소속 B선수의 후원을 제안하기 위해 몇몇 내용들을 설명하면서 제안서 작업을 요청한다. 혹은 카톡으로 빠르게 요청할때도 있다.
이처럼 선임들이 일 지시를 할 때, 담당자는 제안 배경을 최대한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좋다. 가령 선임담당자가 이미 협의를 다 마쳤고, 후원사 담당자가 단순 보고를 위해 문서만 필요한 데, 정작 일 지시를 받은 주니어 팀원은 그것도 모르고 장황하게 제안서를 만드는 오류를 범할 때가 있다.
3. 오타와 팩트 확인은 기본 중의 기본!
선수 후원 제안서이다 보니 제안 내역에 선수들의 계약금 등 숫자가 들어가는 경우가 많다. 언젠가 있었던 일이다. 선수 후원 제안서를 급히 작성해서 메일로 보냈더니 담당자가 연락이 왔다. "동현 씨, 진짜 이 금액으로 보고 하면 되는 거죠?" 뭔가 기분이 싸했다.
제안서를 보니 천만 원대 단위의 금액이어야 할 숫자가 백만 원대 단위로 되어있었던 것. 숫자 O이 하나 빠져있었다. 정말 다행히도 친한 관계인 담당자가 먼저 발견해서 큰 사고를 막을 수 있었다. 그게 아니라 처음 연락하는 담당자였고, 그대로 내부에 보고를 했더라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그러니 제안서를 마무리하면, 오타와 팩트 체크는 꼭 하자. 나의 경우에는, 작성된 제안서를 중요한 부분만이라도 꼭 종이로 출력해서 소리 내어 읽으며 오타 체크를 했었다. 효과는 아주 좋다. 추천하는 방법!
4. 한 슬라이드에는 하나의 메시지가 꼭 도출되도록 한다.
특히 여러 자료가 들어가는 긴 제안서일수록 자주 빠지는 함정이다. 페이지는 있는데 메시지가 없는 제안서. 뭔가 머릿속에 명확하게 그려지지 않지만 나름의 '뇌'비게이션의 흐름에 따라 제안서를 작성한다. 논문에서 혹은 구글에서 발견한 좋은 자료를 넣어 표로 만드니 제안서가 멋드려 저 보인다.
그렇게 제안서를 완성하고 전달했더니 듣는 피드백 중 하나. "그래서, 이 페이지는 뭘 말하는 거죠?" 좋아 보여서 넣었고, 도움이 되는 것 같아 넣었는데 말하고자 하는 바가 없는 페이지들이 있다. 그래서 내가 항상 노력하는 것 하나 "하나의 슬라이드에는 꼭 명확한 하나의 메시지를 도출해라. 읽는 사람이 이해하기 쉽도록!"
5. 자료 전달 기한을 잘 지키자. 이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꽤 했던 실수 중 하나는 뭔가 더 멋진 근거, 더 멋진 페이지를 만들기 위해 상사가 요청했던 Due date를 못 맞추는 경우가 있었다. 그 날짜는 괜히 나온 날짜가 아닌데 말이다. 분명 그 상사도 내가 작업한 제안서를 받아 수정할 것은 수정하고, 언제까지 전달을 해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주니어시절 이 전달기한을 가끔씩 못 지키는 경우가 있었다. 뭔가 맘에 드는 내용이 안 나오면, 진행자체를 못한 것이다. 그래서 글 결과는? 그냥 깨졌다. 늦어질 것 같으면 미리 상황을 공유하자. 그래서 전달 시점에 대한 조정이 가능한지 물어보자. 일을 지시한 상사에게든 혹은 소통하는 외부 담당자에게든.
고진영 선수는 2017년도부터 하이트진로의 후원선수가 됐다.
음... 어제 정리했을때 보다 내용을 좀 줄였다. 주제를 내가 제안서를 작성할 때 신경쓰는 포인트 보다, 했던 실수들에 더 포커스를 두고 작성을 했다. 제안서를 '잘'쓰는것은 하루 아침에 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쁜 제안서를 피하는 '기본'을 지키는 방법은 꽤 빠른기간에 습관화 시킬 수 있다.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