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칠순 때문에 읽은 책

필립 로스 '아버지의 유산'을 읽고

by sposumer

만약 20대 대학생이었던 내가, 마흔 살이 된 나를 볼 수 있다면 깜짝 놀랄 것이다. 20대의 나는 꼭 결혼을 하겠다고 생각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첫 아이가 태어난 지 이제 곧 백일이 되는데 내가 결혼을 한 것은 놀랄 일이 아닌지도 모른다. 20대였던 내가 마흔 살이 되었으니 아버지가 칠순이 된 것도 당연한 일이다. 나는 도서관에 가면 습관처럼 신착 도서 서가에 들리는데, '아버지의 유산'도 그렇게 우연히 만나게 된 책이다. 다만 평소의 나였다면 이 책을 무심하게 지나쳤겠지만 아버지의 칠순이 얼마 남지 않은 시기라서 집어 들었다. 내가 마흔 살이 되도록 아버지께 해드린 것은 아웃도어 브랜드에서 일할 때 등산화를 사드린 것 정도이다. 물론 더 해드린 것이 있을 수 있겠으나 더 기억나는 것이 없는 것을 보면 효자는 아니다. 그렇지만 아버지께 미안한 것들은 수도 없이 머리 속에 떠오른다. 과음으로 응급실에 실려간 사건부터 인기 가요 순위처럼 머리 속에서 튀어나온다. 나도 아버지의 칠순을 맞아서 다른 자식들처럼 특급 호텔에서 잔치도 해드리고 해외여행도 보내드리고 싶었다. 하지만, 진짜로 그렇게 해드리려고 했으면 평범한 회사원인 나는 차근차근 준비를 했어야 했다. 첫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준비도 철저하게 하지 못했지만, 아버지의 칠순에 대한 준비는 전혀 하지 못해 참 부끄러울 뿐이다. 아버지께 부끄럽고 죄송한 마음으로 '아버지의 유산'을 읽었다.


저자 필립 로스는 나이가 들면서 쇠약해지고 하루하루 죽음에 다가가는 아버지의 모습을 충실히 기록했다. 아버지가 예전과 달리 올바르게 판단을 하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아버지에게 명령을 하기도 한다.


“자, 스웨터를 입고 운동화를 신으세요. 제가 릴한테 전화를 할 테니까. 릴이 함께 가고 싶다고 하면 다 같이 산책을 나가는 거예요. 아름다운 날이라 이렇게 안에만 앉아 있을 수는 없어요. 커튼까지 다 내리고 말이에요.”
“나는 안에 있어도 괜찮아.”
그 순간 나는 아버지에게 네 단어, 그전에는 평생 아버지에게 해본 적이 없는 네 단어를 내뱉었다. “제가 하라는 대로 하세요.” 나는 그렇게 말했다. “스웨터를 입고 운동화를 신으세요.”
그것은, 그 네 단어는 먹혔다. 나는 쉰다섯이고, 아버지는 여든일곱이 다 되었고, 때는 1988년이다. “제가 하라는 대로 하세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 – 아버지는 그렇게 한다. 한 시대의 끝이고, 다른 시대의 새벽이다.

- 94 페이지 중에서 -


책은 후반부로 갈 수로 가슴 아픈 장면들이 많아진다. 나는 필립 로스의 아버지가 똥을 싸고 슬퍼하는 장면에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었다. 내 친할머니가 병원 입원하셔서 치매 증상이 시작되었을 때 비슷한 상황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세스와 루스가 점심을 먹으러 왔기 때문에, 우리 모두 가벼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어느 여름날 못지않게 유혹적인 맑은 날이었지만 아버지는 무시무시한 도망 방지 장치가 갖춰진 울타리, 도살장의 우리가 되어버린 몸 안에 완전히 고립되어 있었다.
점심식사가 끝날 무렵 아버지는 의자를 뒤로 밀고 부엌으로 향하는 계단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식사 중간에 일어서서 자리를 뜬 것이 그것으로 세 번째였는데, 위층으로 올라가는 것을 도우려고 나도 함께 일어났다. 하지만 아버지는 내 도움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가 다시 대변을 보려고 일어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창피해할까 봐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커피를 마시다가 아버지가 아직 안 내려왔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다른 사람들이 이야기를 하는 동아 나는 조용히 식탁에서 일어나 슬며시 집안으로 들어갔다. 아버지가 죽었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죽지 않았다. 차라리 죽기를 바라기는 했겠지만.
이층으로 올라가는 층계 중간쯤부터 똥냄새가 났다. 화장실에 갔더니 문이 조금 열려 있었고, 화장실 밖 복도 바닥에는 거친 무명천으로 만든 바지와 팬티가 있었다. 화장실 안에는 아버지가 완전히 벌거벗고 서 있었는데, 막 샤워를 마쳐 몸에서 물이 뚝뚝 듣고 있었다. 냄새가 지독했다.
아버지는 나를 보자 울음을 터뜨리려고 했다. 아버지에게서건 그 누구에게서건 처음 들어보는 쓸쓸한 목소리로 추측하기 어렵지 않은 일을 이야기했다. “똥을 싸버렸어.” 아버지가 말했다.
사방에 똥이었다. 발에 밟혀 욕실 매트에 묻었고, 변기 가장자리 너머로 넘쳤고, 변기 아래쪽 바닥에는 한 무더기가 쌓여 있었다. 아버지가 막 나온 샤워 칸막이의 유리에도 튀겼고, 복도에 버려진 옷에도 묻었다. 아버지가 물기를 닦고 있는 수건 귀퉁이에도 묻었다. 보통은 내가 사용하는 자그마한 욕실에서 아버지는 혼자 자신이 어질러놓은 것에서 빠져나오려고 최선을 다했지만, 거의 눈이 먼 상태인데다가 퇴원한 지도 얼마 되지 않아, 옷을 벗고 샤워를 하러 가는 과정에서 모든 것에 똥을 묻히고 말았다. 세면대 위의 걸이에 걸려 있는 내 칫솔의 솔 끝에도 묻은 것이 보였다.
“괜찮아요,” 내가 말했다. “괜찮아요, 다 괜찮아질 거예요.”
나는 샤워 칸막이 안으로 손을 뻗어 다시 물을 틀고 적당한 온도가 될 때까지 수도꼭지를 움직였다. 아버지 손에서 수건을 받아들고 아버지가 다시 샤워를 하도록 도왔다.
“비누를 들고 처음부터 다시 하세요.” 나는 말했고, 아버지는 순순히 다시 비누로 온몸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그동안 나는 옷과 수건과 욕실 매트를 한데 쌓아놓고 복도를 걸어 리넨 장으로 가서 그것들을 담을 배갯잇을 꺼냈다. 아버지에게 줄 새 목욕 수건도 챙겼다. 나는 아버지를 샤워실에서 나오게 하여 곧바로 바닥이 아직 깨끗한 복도로 데려가, 수건으로 몸을 감싸고 물기를 닦기 시작했다. “씩씩하게 노력을 하셨네요.” 나는 말했다. “그런데 안됐지만 승산이 없는 상황이었어요.”
“똥을 싸고 말았어.” 아버지는 말했고, 이번에는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

- 203 ~ 5 페이지 중에서 -


책 표지를 장식한 필립 로스의 가족사진을 보면 아버지는 키가 크고 건장한 체격이었다. 그런 아버지가 원치 않는 똥을 싸버리고 울고 있는 장면은 안쓰러움과 동시에 노쇄와 죽음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만든다.


죽는 것은 일이었고 아버지는 일꾼이었다. 죽는 것은 무시무시했고 아버지는 죽고 있었다.

- 278 페이지 중에서 -


누나와 나는 아버지의 칠순 잔치 아니 친척들과 아버지 친구분들을 초청해서 조촐한 식사 자리를 마련했고, 별일 없이 마무리했다. 아버지, 나, 내 아들이 나란히 서서 사진도 찍었다. 칠순을 맞아 찍은 아주 뻔한 사진이지만 나에게는 '아버지의 유산' 책 표지를 떠오르게 한다. 매사에 성실하신 내 아버지는 내게는 늘 존경스러운 일꾼이다. 하지만, 죽음이라는 한 가지 일만은 늦게 하셨으면 좋겠다. 누구도 막을 수는 없는 일이지만 말이다.


P.S. '아버지의 유산' 본문 중에서 <막 샤워를 마쳐 몸에서 물이 뚝뚝 듣고 있었다.>라는 문장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 책의 번역을 맡은 정영목 씨는 내가 만족스럽게 읽었던 주제 사라마구나 알랭 드 보통의 책도 번역하신 분이다. 번역이 잘못된 것이 아니고 혹시 오타가 아닐까 궁금해서 출판사인 문학동네에 이메일로 문의를 했다.


Q. 저는 <막 샤워를 마쳐 몸에서 물이 뚝뚝 듣고 있었다.>라는 문장보다 <막 샤워를 마쳐 몸에서 물이 뚝뚝 흐르고 혹은 떨어지고 있었다.>라는 표현이 더 적당한 것 같은데 오타인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A. 문의하신 '듣다'는 사전에 있는 동사로, 액체 뚝뚝 떨어지는 모양을 뜻합니다.

예문: 빗방울이 지붕에 듣는다. 우산 위에 듣는 빗소리조차 조용한 골짜기에 유난히 구슬피 들렸다.(염상섭, 굴레)


'듣다'라는 표현을 위 예문처럼 많이 쓰지는 않지만, 역시 아는 만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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