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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아빠가 아들에게 들려주는 달리기 이야기

7번째 편지, 달리다 가끔은 멈추어도 좋아

by sposumer

사랑하는 원이야,

니가 태어나고 아빠가 앞장서서 중고 육아 물품을 구입한 것은 딱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도이터(Deuter)라는 아웃도어 브랜드에서 나온 키드 컴포트(kid comfort)라는 제품, 두 번째는 툴레(Thule)라는 브랜드의 어반글라이드(urban glide)라는 달리기용 유모차란다.

키드 컴포트라는 제품은 간단히 설명하면 유아를 등에 지고 다닐 수 있도록 해주는 배낭 정도로 설명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너를 유모차에 태우고 외출을 하면 층과 층으로 이동을 할 때는 엘리베이터를 탈 수 밖에 없어. 특히 유모차를 가지고 지하철을 타는 것은 참 쉽지가 않은 일이란다. 지하철 엘리베이터는 연세가 지긋하신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타기에도 비좁거든. 그래서 엄마가 키드 컴포트까지는 중고로 구입할 때 크게 뭐라고 하지는 않았어. 지하철을 타고 어디로 가더라도 계단과 에스컬레이터를 탈 수 있어 편하거든. 단 한 가지 단점이 있다면 니가 이 지게에서 잠이 들면, 고개가 좌우 한 쪽으로 처진다는 것이지.

툴레 어반 글라이드는 거의 새 것 같은 중고를 인터넷에서 찾았는데, 이 물건을 받으러 강화도까지 가야했단다. 그래도 아빠는 꼭 사고 싶은 물건이라서 주말에 강화도에 가서 신나게 가지고 왔다. 니가 태어나기도 전에 주변 사람들에게 받은 중고 유모차가 두 개에 엄마랑 의논해서 산 유모차까지, 이미 유모차가 세 개나 있었으니 툴레 어반 글라이드는 꼭 필요한 유모차는 아닐 수도 있었지. 하지만 다른 유모차들에 너를 태우고 달리기를 할 수는 없어서 아빠 입장에는 꼭 필요한 유모차였어.

아빠는 너랑 같이 올해 서울국제마라톤에 나가고 싶었는데, 유모차 달리기 전문가인 션 씨에게 여쭈어보니 적어도 돌은 지나고 유모차 달리기를 시작해야 한다고 조언해주셔서 참가신청만 해두고 나가지 못했다. 그리고 지난 주말까지 툴레 유모차는 달리기할 때 사용한 적이 없었다. 툴레 유모차는 덩치가 꽤 커서 현관문 앞에서 자리만 차지하고 먼지가 쌓여가고 있었지.


8월은 어떻게 해도 더우니까 지난 토요일에 아빠는 큰 맘을 먹고 너랑 첫 달리기를 했다. 우리집에서 가까운 올림픽공원은 그늘이 많아서 너도 많이 더울 것 같지는 않았다. 엄마랑 같이 외출을 할 때는 엄마가 이것저것 준비물을 챙기는데, 너랑 달리기를 하는 거니까 아빠가 준비물도 챙겼어. 평소에 엄마가 외출 준비를 할 때 바쁜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어. 제일 중요한 건 날씨가 더우니까 니가 마실 시원한 보리차까지 챙겨서 출발을 했지. 토요일이지만 강동구청 앞에 분수가 가동되고 있어서 시원하게 달리기를 시작했지.

원래 달리기를 할 때는 준비운동도 해야하는데 너랑 달리기를 하니까 준비운동을 생략했기 때문에 올림픽공원으로 가는 대로가 나오기 전까지는 준비운동을 겸해서 천천히 걸어갔어. 달리기를 시작하고 5분 정도마다 멈춰서서 니가 괜찮은지 확인을 했지. 너는 아빠가 달리기를 하는 것보다는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들(니가 요즘 늘상 외치는 '빠방')을 보는 것에 더 관심이 많더구나. 중간에 신호등이 있는 곳까지 있어서 충분히 쉬면서 달렸는데도 많이 덥더라. 아빠 머리부터 발끝까지 땀이 나는 것을 물론이고 유모차 손잡이를 잡고 달리면서 팔치기를 못해서 그런지 평소에 달리는 것보다 힘이 들었어. 니가 빠방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그늘이 없는 대로변보다는 시원한 올림픽공원을 달리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공원으로 들어가서 계속 달렸다.

올림픽공원에 편의점을 보니 니가 마실 보리차는 챙겼는데, 아빠가 마실 물을 깜박했더라. 아빠가 마실 생수를 한 병 사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원한 나무 그늘에서 너를 유모차에서 내려주었다. 너는 늘 올림픽공원에 가면 돌맹이를 주워서 흙바닥을 긁는 것을 좋아했는데, 역시 돌맹이 하나를 줍더니 열심히 흙장난을 시작했지.

놀고 있는 너를 보면서 잠깐 아빠도 딴 생각을 했다. 아빠는 15년 동안 직장생활을 하면서 멈춘 적이 없었다. 이직을 한다는 건 달리기로 치면 달리던 코스를 벗어나서 다른 코스를 달리는 것이지 멈춰서는 것은 아니니까. 이상하게 아빠는 이직을 할때 쉬는 시간없이 한 회사를 그만두면 바로 다른 회사로 출근을 했다. 생각을 해보면 지금까지 달려온 길이 맞는지 앞으로 달려갈 길이 맞는지 여유있게 살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그렇게 해본 적이 없었다.


마라톤 풀코스를 달리다보면 꼭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쉬고 싶을 때가 있다. 다리에 쥐가 나서 어쩔 수 없이 멈추어 쥐를 풀어주는 경우를 빼고는, 달리다가 멈추어 서버리면 완주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많이 힘이 들다면 달리기를 멈추고 잠시 멈추는 것은 좋지만 그 잠시가 길어지면 안된다. 휴식 시간이 길어지면 다시 달리려고 해도 근육이 잘 말을 듣지 않아. 아빠는 이번에 15년간 달리다가 잠시 멈추게 됬지만 털썩 주저 앉지는 않을 거야. 그렇게 하면 아빠의 인생에서 완주를 할 수 없을 것 같아. 아빠는 힘이 들더라도 천천히 걸으면서 다시 달릴 길을 찾아볼께. 너도 커서 무작정 죽어라 달리지 말고 가끔은 멈추어도 좋아.


지난 토요일 너와 첫 유모차 달리기 거리는 약 5km이고 휴식 시간을 빼면 1km를 5분에 달리는 페이스로 달렸어. 첫 유모차 달리기를 했다는 것 자체로도 아빠는 기분이 좋았고, 이보다 더 기분이 좋았던 것은 니가 달리는 유모차 안에서 잠이 들었던 거란다. 아빠만 너와 달려서 즐거운 것이 아니라 너도 조금씩 흔들리는 유모차에서 편하게 잠을 자고 있는 모습을 보니까 너무 기뻤어. 집에서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고 있어도 아빠가 그런 꿀잠을 선물할 수는 없으니까.

한 주를 시작하는 월요일, 비가 내리고 있다. 이번 주말에도 비가 내리지 않으면 아빠랑 같이 또 달려보자!


사랑하는 아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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