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커일기 (2022년 2월 7일)

폐지 줍는 할머니와 택시

by sposumer
정신을 차리고 찍은 사진. 폐지줍는 할머니도 택시기사도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는 상황에 대한 참고용.

2022년 2월 4일 금요일. 구정 연휴가 끝나고 무거워진 엉덩이를 떼고 집을 나서기가 쉽지 않았다. 놀러 나가는 것도 아니고 자전거 배달을 하러 나가는 일이니까 안 나갈 핑계는 수도 없었고, 결정적인 핑계도 한 가지 있었다. 구정 연휴 직전 밤에 늘 사용하던 장갑을 분실한 것이다. 뭐 장갑이 없다고 배달을 못하냐고 그럴 수도 있지만 장갑은 겨울철 자전거 배달에서 매우 중요한 장비이다. 겨울에 달리기를 하러 나와서 장갑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면 긴소매 속에 주먹을 말아 넣고 달린다와 같은 대안이 있다. 하지만 겨울철 자전거 배달에 장갑이 없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자전거를 타고 찬 바람이 불면 가장 먼저 시린 것은 손이다. 자전거를 능숙하게 타서 주머니에 손을 넣고 탄다고 해더라도 스마트폰으로 오는 콜을 받고 지도를 보면서 이동할 때는 손가락을 움직이지 않을 수가 없다. 단짝 장갑을 핑계로 쉴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구정 연휴 내내 쉬었는데,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다른 장갑을 끼고 출동했다.


역시나 단짝 장갑이 아닌 다른 장갑은 스마트폰 터치와 지도 확대를 하기 위한 꼬집는 듯한 동작을 잘 도와주지 못했고, 오른손 장갑을 끼었다가 벗었다가를 반복하면서 배달을 하게 되었다. 배달만 신경을 써도 정신이 없는데, 저 직선구간에서 장갑을 벗고 지도를 확대해보자 이런 생각까지 해야 하니 참 불편했다. 게다가 바람도 무척 심했다. '바람이 강하게 불고 있다'라는 소설과 만화책을 참 좋아하지만, 참 자전거 배달을 하기는 별로인 날이었다. 그나마 점심 배달이라서 조금은 햇볕을 받고 있다는 것이 참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점심 배달답게 배도 고픈 상태로 티켓 자판기가 잘 어울리는 프랜차이즈 규동 집에 배달음식을 픽업하러 도착했다. 오후 1시가 넘었지만 두 명이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고, 맛있는 규동 냄새를 맡으면서 배달음식을 기다려야만 했다. 멍하니 창 밖을 보고 있는데, 폐지를 줍는 할머니 앞으로 택시 한 대가 급하게 섰다.


'뭐지?' 이렇게 생각했다. 폐지를 줍는 할머니가 방해가 된다고 큰 소리에 삿대질이라도 하려는 건가? 예약 손님이 있나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정말 의외의 장면이 내 눈앞에 벌어졌다. 택시에서 내린 택시기사는 폐지를 줍는 할머니의 조끼 주머니에 뭔가를 막 집어넣으셨다. 몇 번이나 고사하시던 할머니는 택시기사에게 다시 몇 번이나 고개를 조아리셨다. 택시기사는 바로 택시로 쏙 들어가셨다. 할머니는 다시 폐지가 실린 접이식 자전거와 연결된 폴딩 쇼핑 카트를 매만지시고 다시 출발하셨다. 배달음식이 아직도 나오지 않아서 나는 멍하니 두 사림이 떠난 차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전거 배달을 하다 보면 강동구 쪽은 폐지를 줍는 노인들을 많이 본다. 내가 가는 방향과 반대편에서 오면 마주치게 되고, 내가 가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면 앞질러 가게 된다. 나는 폐지를 줍는 노인들은 그냥 차도를 달리고 있는 차와 똑같이 생각했던 것 같다. 그 택시기사님이 어떤 사연이 있는 것인지, 얼마나 주셨는지 이런 것이 궁금하기는 하지만, 이보다 중요한 것은 어쨌든 가던 길을 멈추고 할머니에게 무언가를 주셨다는 것이다. 이 무엇이 지폐가 아니라면 어떤가? 금요일 점심을 배달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그 풍경은 잊히지를 않았다. 코로나 때문에 어려워진 사람들이 많지만, 아직도 주변에 마음이 따뜻한 분들이 많다는 것은 금전적인 보상과 다른 심리적인 위안이 되었다.


토요일, 5살 아들과 동갑 아들이 있는 후배네 집에 놀러 갔다가 초저녁에 돌아오게 되었다. 보통 놀러 가면 저녁까지 먹고 오는데, 아들은 마트에서 산 레고를 조립해서 놀고 싶어서 집에 빨리 가자고 했다. 약간은 어둑어둑한 하늘 아래 운전을 해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주행 방향과 반대로 리어카에 폐지를 가득 실은 할머니 한 분이 다가오고 계셨다. "아, 저렇게 반대로 오시면 위험한데..."라고 말하면서 나는 운전을 계속했다. 사실 이 할 머니가 아니었다면 금요일 따뜻했던 의외의 한 장면도 잊혔을 것이다.

월요일 점심 배달, 오늘은 배달을 하면서 폐지를 줍는 노인을 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차가운 겨울바람은 내 눈에 자꾸 금요일 그 장면을 다시 생각나게 만들었다. 눈에 살짝 흐르는 눈물은 그 장면 때문일까? 내가 오늘도 늙어가고 있기 때문일까? 겨울 날씨와 냉혹한 현실은 자꾸 마음을 차갑게 만들지만, 나도 누군가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도록 살아보자고 다짐하는 저녁이다.

P.S. 참, 분실했던 장갑도 생각하지 못한 곳에서 마음이 따뜻한 분들 덕분에 찾았다! 세상은 아직 생각보다 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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