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커일기 (2022년 3월 17일)

공친 날

by sposumer

골프를 치는 사람이라면 공친 날은 라운딩을 다녀온 날을 의미한다. 하지만, 배민커넥트 자전거 배달을 하는 나에게 공친 날은 배달을 예상만큼 하지 못한 날이다. 대학교 때 공사장에서 잡부와 철근 가공 아르바이트로 일을 할때, 작업 시간 중에 비가 오면 아저씨들이 "아, 오늘 반대가리 날렸네! 빨리 갑빠(철근이 녹슬지 않도록 덮어두는 방수포) 덮어라!"라고 외쳤다. 공사장에서는 장마철에는 아예 작업을 할 수 없으니 공친 날이었다. 어제는 자전거 배달을 하면서 최고로 공친 날이었다.

아침에 담당하고 있는 프로젝트 일을 마무리 하다가 출발이 늦었다. 12시쯤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배민커넥트 앱을 켜고 신규 배달 스위치를 눌렀다. 첫 번째 콜이 3,800원짜리 떡볶이 배달이었는데, 거절했다. 이제까지 경험상 점심과 저녁시간에는 콜이 끊이지 않아서 배달을 충분히 고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유는 모르지만 송파구 지역으로 배달을 하면 1건당 1,000원을 더 주는 프로모션이 계속되고 있어서 강동구보다는 송파구로 배달을 가고 싶었다. 그래야 계속 송파구 지역에서 배달을 할 가능성이 높으니까. 두 번째 배달은 3,100원짜리 분식 배달이었다. 강동구로 배달이었지만, 또 너무 콜을 고르면 안된다는 경험치 때문에 배달을 시작했다. 분식집에서 음식을 픽업할 때, 다음 콜이 오지 않았다. 노래 가사처럼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 그 후로 약 1시간 동안 콜이 없었다.

첫 배달인 분식 배달을 마치고 강동구 둔촌동에서 송파구 방이동 먹자골목을 지나서 다시 강동구 천호동 로데오 거리까지 왔는데, 정말 콜이 한 건도 들어오지 않았다. 배달이 아니라 콜이 없이 거의 한 10km 이상을 자전거로 돌면서 여러가지 생각을 했다. 첫번째로 든 생각은 '내가 배차거부를 많이 했나?'였다. 계속 AI 배차를 사용하고 있고, 내 배차 수락율은 80%를 넘는다. 하지만, 나는 AI 배차의 알고리즘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한 것 같다. 경제적 이해관계에 있는 당사자들 간에 정보가 한쪽에만 존재하는 '정보의 비대칭성(asymmetric information)'의 예라고 할까? 그렇지만, 솔직히 그보다는 내가 첫 콜을 거부한 것 때문에 내가 불이익을 받은 것이 아닌가 하는 막연한 불안감이 더 컸다.

1998년도에 수학능력시험을 보고 대학교에 원서를 세 군데나 넣었으나 두 군데 불확격이 확정되었을 때, 더 정확히는 '다'군이었던 아주대 심리학과를 떨어지고 나서, 어디에도 말 못하는 불안은 나를 지배했었다. 내가 왜 떨어졌을까 생각을 하다가 고등학교에서 쪽문으로 출입을 해서 그런가 생각을 하기도 했다.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에는 고3때 정문과 쪽문 중에 쪽문으로 출입을 한 사람은 대학에 떨어진다는 소문이 있었다. 친구들이 그 이야기를 하기에 그런게 어디있냐고 하면서 나는 자신있게 고3 내내 쪽문으로만 등교를 했다. 그런데 막상 대학교 입학이 마음대로 안되니 이 말도 안되는 '쪽문의 저주'까지 떠올랐던 것이다. 어제 배달가방을 매고 1시간을 자전거로 돌아다니며, 나는 정말 첫 콜을 거절한 것을 무척 후회했다.

두번째 생각, 아니 가설은 '코로나 때문인가?'였다. 정부에서 독감정도라고 발표했던 코로나 오미크론 변이는 최대 확진자 및 사망자수를 경신하고 있었다. 코로나 때문에 자가격리나 재택근무가 많다면 배달이 늘어나야 할 것이지만, 주변에 확진이 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너무 아파서 밥을 챙기기 어렵다는 사람도 있었다. 점심을 거를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아픈 것인가? 코로나 확진으로 괴로워하는 사람들을 생각하기보다는 오늘 왜 배달이 줄었을까를 생각하는 내가 한심해서 이 가설은 금새 접었다.

이제 포기하고 집으로 가자라고 생각하면서 강동역을 지날 때쯤에 두 번째 콜이 왔다. 밥이 아니라 과일 배달이었다. 과일 배달 전문점은 과일을 바로 먹을 수 있게 손질해서 포장해주는 곳이다. 과일과 함께 먹을 수 있는 메뉴들도 함께 판매를 한다. 가게는 철거가 확정된 건물의 바로 옆에 있었다. 나말고도 오토바이 배달 라이더 한명이 배달 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용기내서 말을 걸었다.


"아, 오늘 이상하게 콜이 너무 없네요."

"네, 오늘 저도 그러네요."


웬지 베테랑 느낌의 라이더가 그렇게 이야기를 하니 뭔가 좀 위안이 되었다. 그래, 나만 이런 게 아니다. 이 불행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별 소득없는 소박한 심리적 안정감이라니... 내 배달 음식 아니 손질된 과일이 먼저 포장이 되어 나왔고, 새로 생긴 오피스텔로 과일을 비대면 배달했다. 점심시간 2시간 동안 배달료 수입 총 6,600원. 배민커넥트를 시작한 이후로 최고로 공친 날 운행을 종료했다.

집에 오면서 든 생각은 배달을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져서 그런 것인가였다. 3월 들어서 젊은 여자분들까지도 배달을 하는 것을 많이 보고 있다. 자전거, 전기 자전거, 킥보드, 도보, 따릉이까지 정말 배달가방을 등에 맨 다양한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배달 수요는 비슷한데 배달을 하는 사람이 많아진다면, 당연히 내가 나누어지는 배달건수는 줄어들 것이다. 나는 배달이 부업이니 상관이 없다. 다만 자전거 배달을 시작하는 누군가가 부업이 아닌 전업으로 전기자전거 구매와 같은 100만원 이상의 투자를 하고 일을 시작한다면... 나는 말리고 싶다. 원래 타던 자전거와 쓰던 헬멧에 배달가방만 사서 부담없이 시작하는 것은 괜찮다. 하지만, 자전거 구매와 같은 큰 투자는 본전을 뽑겠다는 생각으로 연결될 수 밖에 없고, 이에 따라서 무리한 운행을 하다가 부상 및 사고의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공친 날이 하루인 건 상관이 없지만, 계속된다면 위에 이야기한 것중에 한 가지는 맞는 것인데, 3월말까지 배달을 하면서 추세를 지켜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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